욥기는 성경에서 어려운 책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욥기를 즐겨 읽지 않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욥에 관한 구약 최고의 학자가 있었습니다. 수업은 분명히 최고였을 것입니다. 또한 그녀의 욥기 과정을 듣는 것은 구약을 전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영광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수업을 일부러 듣지 않고 피했습니다. 왜냐하면 욥기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읽기 어렵게 만드는 한 가지는 그것이 무고한 사람의 고통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니 그런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이 누구입니까? 욥기서는 욥이 어떤 사람인지 정의를 내리며 시작합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 1:1)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가 욥을 읽을 때 욥의 이런 상황은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 전까지 바뀌지 않습니다.
사실, 불의를 경험하거나 목격하는 것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불의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오늘날 불의는 자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많은 범죄와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범죄자가 수단이 있고 시스템을 악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때 법과 처벌에서 종종 도망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권력, 재력, 학력이 높은 층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한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축적한 부로 삶을 계속해서 즐깁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언제까지입니까?”를 외치게 됩니다.
이것은 욥기의 두드러진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 주제에 접근하는 두 가지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먼저 고전적인 견해로 악인은 그가 한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처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신명기 28장에 기초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이 신명기적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고전적인 견해를 사용해서 욥 자신은 모르고 또는 부인하지만,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그가 모든 것을 잃고 고통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또 다른 견해는 악인들이 종종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이 이 입장을 대변합니다. 이 사실을 두고 욥은 친구들의 견해에 논리적 오류가 있음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결백함, 즉 의인이 고통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또한 주장합니다.
21장 23~26절에 있는 욥의 말은 이 점을 잘 요약합니다. 욥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
욥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와 매우 유사합니다. 우리는 악인들이 벌을 받지 않고 번성하는 것을 보고 분노합니다. 그런데 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읽을 때 참으로 악인이 응보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욥을 비난하는 소발이 옳고 욥이 그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소발이 틀렸고 욥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욥기 말미에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을 꾸짖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둘 다 틀리고 둘 다 옳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둘 다 맞는다는 양시론 또는 둘 다 틀렸다는 양비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둘 중 하나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욥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이해하기가 좀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어떤 범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욥과 그의 친구들 견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보이는 것만 세어보면, 벌을 받지 않고 의인과 헌신된 사람보다 더 즐거운 삶을 사는 악인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믿음과 눈이 있다면 마지막 심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그것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누가복음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나사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부자도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 상태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우리가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사로와 같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자와 같이 살고 이후에는 나사로와 같이 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 이후에도 좋은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보험으로 교회를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세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두 세계 모두에서 좋은 것을 갖기는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방승호 박사는 센트럴신학대학원 한국부 구약분과 조교수(겸임)겸 구약 분과장으로서, Baylor University 종교학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성서고고학자로 이스라엘에서 고대 남유다지역의 도시를 발굴하는 The Lahav Research Project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웨이코한인감리교회에서 대학생/유스를 담당하면서 휴잇제일감리교회에 담임목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