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를 보면서 이 세상엔 천재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무던히 길고 난해한 문장과 다양한 모티브를 지녔기에 이 소설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러나 작가의 천재성과 노력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유는 이 소설이 ‘시간’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할 장수가 있던가? 이 시간 안에서 삼라만상이 운행되고, 인생들이 스쳐가며, 모든 존재가 그 의미를 담아낸다. 시간은 종국엔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라 칭하는 것들을 잠시 품는 어미의 태와 같다.
사춘기 시절 나의 반항은 전적으로 시간에 대한 반항이자 저항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 속에 들어오고 그 속에 갇혀서 늙고 다시 사라져야 하는 존재, 그것은 시간의 무자비한 횡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내게 감옥과도 같았다. 영어(囹圄)의 존재가 살아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위안을 찾고 싶었다. 로마의 황제이자 철인, 그에게서 놀라운 지혜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 완고한 스토아 학자의 일관된 변(辯)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찬란한 나뭇잎이 이내 썩은 낙엽이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는 그의 은유에서 내 희망도 흙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기댈 곳이 없었다. 시간이라는 불합리를 이해하거나 그 본질을 돌파할 어떤 실마리도 보이지 않아 깊은 좌절에 빠졌다.
그러다가 복음을 만났다. 시간 밖에 절대자가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분의 말씀은 영원하며 그 말씀으로 이 세상과 나를 지으셨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분 안에서 나는 영원한 존재가 됨을 이해했다. 공의로운 그 분은 시간 안에 갇힌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시간 속으로 보내사 영원한 그 나라를, 영원한 생명을 알게 하시고 찾게 하셨다. 그 후로부터 나는 내 모든 시간을 그 분께 걸기로 작정했다.
어디 천재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뿐이랴, 천재든 나 같은 범인에게든 시간은 돌파해야 할 그러나 도무지 돌파할 수 없는 부조리이자 시지프의 형벌이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길은 기억에 있다고 항변한다. 기억 속에 드리운 수많은 시간의 파노라마 그리고 향연들. 그러나 과연 사람의 기억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는 기제가 될 수 있을까? 시간을 이길 힘, 그래서 시간 속에서 새롭게 되고 시간 밖의 영원을 힘 입을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기에 이제 당당히 고백한다.
시간, 너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