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이어)
그런데 예산결산 보고서를 처음 접한 나는 교회 예산 부분을 살피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담임 목회자의 도서비 액수였습니다.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지요. 나는 중고등부 일로 담임목사 사택을 여러 번 들락날락했기에 목사님 서재의 오래된 책과 새 책이 얼마나 있는지 거의 파악하고 있었기에 책정된 도서비가 어떤 근거로 책정된 건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었지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다만 합리적이지 않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교회 관례에 익숙했었다면, 감히 그런 질문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제 겨우 교회 생활 1년 차밖에 안 됐기에 멋도 모르고 그런 질문을 한 거지요. 그 바람에 교회 맨 뒤 좌석에 앉아있던 내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꼈지요.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그러한 질의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담임목사에게 책정된 예산에 무엇인가 합리적이지 않은 점들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지요. 이 우발적인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나를 교회와 목회자에 대하여 점점 불편한 느낌이 들게 만들더군요.
내가 또 한 가지 답답하게 여겼던 점은 성경과 신앙에 관한 의문점들을 해소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처음 교회를 갔으니 모든 게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특히 창조, 타락, 구원 등등의 신학적 내용들이 어찌 이해가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구원의 확신’이라는 주제는 나를 매우 힘들게 만들었지요. 확신이라는 게 어찌 한결 같을 수가 있겠나요. 어떨 때는 확신이 있는 것 같다가도 다른 때는 확신의 그림자 조차도 없는 것 같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확신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련회에 열심히 참가하였지요. 수련회에 모인 젊은이들이 열정적으로 부르는 찬양과 외치는 기도 소리와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강사들의 도전에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껏 뜨거운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여전히 불확실한 믿음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내 모습에 좌절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나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의 여러 학생선교 단체와 다양한 교단의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물론 기도원도 찾아다니면서 말이지요. 한 번은 추운 겨울에 북악산에 있는 기도원에 올라가서 눈발을 맞아가며 기도하다가, 멀리 내려다 보이는 서울의 야경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주님께 이렇게 투덜거렸지요. “하나님, 다른 사람들은 이 시간에 모두 잠들어 있는데, 나는 왜 이곳에서 추위에 떨고 있어야 하는가요? 나는 왜 이런 꼴로 있어야 하는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성경 본문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였습니다. 설교나 성경공부에서 다룬 본문에 대해 질문을 하면 결국에 돌아오는 대답은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된다”는 거였습니다. 모두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겨서 그런지는 몰라도 성경에 나온 내용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조차도 불경스럽게 보는 것 같더군요. 그렇지만 나는 내가 가진 의문점을 풀지 않고는 헌신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확신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순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찾기 위해 약 칠 년 간 헤매다가 IVF에서 개최하는 수련회를 소개 받았습니다. 군제대를 하고 복학 후에 학교에 걸린 수련회를 여는 학생선교 단체 이름이 IVF였는데, 군입대 전에는 보이지 않던 단체였습니다. 게다가 다시 돌아간 모교회 청년부 담장 교역자가 IVF 간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소개로 그 단체의 수련회에 참가하기로 했고, 그곳에서 이동원 목사님의 히브리서 강해를 듣게 되었지요. 그때가 나의 인생의 전화점이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구원의 확신을 찾으러 다녔는데, 나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자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성경이 증명해 주고 있었던 겁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의 기분에 따라 때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구원의 문제를 판단할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기분과 상관없이 항상 변함없는 기준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흔들린 적이 없었지요.
이렇게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로 발을 내디뎠던 거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답답한 면이 있었지만, 이 모교회에서 나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였으니까요. 첫째로, 내가 질문이 많은 자였다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기 전에는 내가 이렇게도 질문이 많은 아이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질문이 나로 하여금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거지요. 둘째로, 공평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그냥 침묵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 안에 형성되어 있던 차별 구조의 부당함을 공론화하려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교회를 다니기 전에는 이런 저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성향은 그 이후에도 여전히 제 안에 내재하고 있지요. 셋째로, 교회 다니기 전에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여러 부서를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내 생각을 각 부서의 구성원들 앞에서 알리고 설득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익숙해졌구요. 넷째로, 다양한 세대와 함께 예배 활동에 참여하면서 어른들과의 대화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가족 어른들과의 대화가 불편해서 되도록이면 말을 섞지 않으려고 피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어른과의 대화가 편했고, 그분들 또한 교회 친구들 부모였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후배들과의 만남에도 그대로 나타났지요. 학교에서는 동아리 친구들과의 사귐밖에 몰랐던 저에게 교회는 다양한 학교 배경의 친구들을 알게 되고, 당시에는 얘기나누기도 힘든 대학생 선배들도 알게 되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얼마전에 이 교회 고등부에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을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50년 만에 만난 선배도 있었지요. 각자 흩어져 살아온 세월이 이렇게 지났는데도 여전히 주님과 동행하는 그 모습들이 참 귀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