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 제일, 세계 최고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쓰기 전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기보다는 세상 힘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세계 제일의 것들을 얻으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런 힘과 과시를 목적으로 삼으면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세력을 과시하다보면 본질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로 라는 말을 얻었던 로마가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수 없을 때, 큰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생명 없으니, 죽은 크기로 승부 본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과거의 종교도, 미래의 종교만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 살아있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비록 작다 할지라도 그 생명이 진짜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연한 순 같이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다 자란 식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새싹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세계제일이거나 최초로 큰 나무도 아니고, 무엇이든 압도 할 수 있는 압도적 모습도 아닙니다. 고운 모양이나 의젓한 풍채나 사람이 흠모할만한 어느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었습니다. 크기로 판단하지 말고 생명으로 판단을 해야 합니다. 생명이 없는 크기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아도 생명이 있음으로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힘의 추구도 아니요. 크기의 추구도 아니요. 화려함의 추구도 아닙니다.
작으면 삼킨바 되고 힘이 없어 삼켜 버리듯 기독교는 삼키면 삼킨바 되는 겁니다. 놀라운 일은 서 말의 밀가루가 작은 누룩을 삼켰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작은 누룩이 밀가루 전체를 변화시켜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삼킨바 된 것이 삼킨 것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파종과 매장의 개념을 되새겨야 합니다, 죽은 것이 묻히면 썩습니다. 생명 없으면 아무리 커도 매장인 것입니다. 그러나 묻혀서 썩는다거나. 묻혀서 죽는 것은 작아도 생명은 묻혀도 죽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파종인 것입니다. 그래서 파종은 새싹이 돋게 하고. 연한 순이 나오게 하고 줄기와 가지가 나와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인으로 생명을 크기와 바꾸는 기독교를 만들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기독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삼키면 삼킨바 되지만. 십자가 붙들고 있으면 병마는 다 뽑아버리게 되고. 가슴 속의 상처를 다 지우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삼키든 말든 상관이 없습니다. 생명은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붙든 사람은 싸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항상 이기게 됩니다. 항상 삼킨바 된 것 같은데, 삼킨 자들이 눈물 흘리며 변화가 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능력이요. 생명의 승리요, 십자가만이 가지는 생명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