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아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 기르고 세워가는 하늘꿈중고등학교가 올해 3월로 20주년을 맞았다. 대한민국 최초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하늘꿈학교는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전인적 교육을 통해 탈북 청소년들을 자유민주 통일과 북한교회 회복을 이루는 일꾼으로 양성하기 위해 지난 2003년 설립됐다.

성남 수정구 선한목자교회(담임 김다위 목사) 앞에 자리한 하늘꿈학교는 현재 중학교·고등학교 각각 3학급씩이며, 78명의 학생들과 17명의 교사가 함께하고 있다. 경기도교육청에서 2016년 이미 중·고등학교 과정 학력인가를 받았고, 교육부 통일준비(시범)학교로 지정돼 있다.

지난 20년간 탈북 청소년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부모가 되어주고 있는 임향자 교장에게 지난 20년과 탈북 청소년들 이야기를 들어봤다. 임향자 교장은 지난 12월 탈북민 지원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늘꿈학교 이야기는 두 차례로 나눠 게재된다.

하나원 초기 탈북민들 대하다 보니
청소년 교육 필요하다는 생각 들어
날 때부터 잘못 인정하지 않는 문화
아이들 분석하기 위해 그룹홈 시작

-탈북민 학교를 시작하신 계기는.

"김동식 목사님이라는 분이 북한 선교를 도와 달라고 하셨어요. 해외 선교를 하고 있어 북한은 생각을 안 해봤다고 말씀드렸는데, 세 번씩 탈북을 시도한 분들 이야기를 공부시키듯 계속 하셨어요. 그러다 김 목사님은 2000년 1월 16일 북한에 납치당하셨죠.

그분을 통해 탈북민들을 도우면서, 그들이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너무 극단적이고 양극화돼 있었어요. 저희가 그들을 도우면서도 잡히면 안 되니 꼬리자르듯 옮겨다니면서 사역을 했는데, 그들은 도움을 받으면서도 큰소리를 뻥뻥 쳤어요. 도움을 주던 가정 집기들을 다 부수기도 했어요. 자존심이 너무 센 거죠.

저는 선교사들을 훈련시키던 사람이라,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어른들은 이미 생각이 고정돼 있어 바뀌기 힘들잖아요. 그 때가 2000년대였는데, 꽃제비들이 많이 넘어왔어요. 정부에서 1999년 하나원을 세웠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때였어요.

잘 됐다 싶어, 전도한다고 생각하고 예배 사역과 여성 사역, 1박 2일 청소년 홈스테이 사역을 시작했어요. 선교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재정도 필요하니 쉽지 않았어요. 하나님 은혜로 2003년까지 하나원과 일했는데, 교회가 일하는 방식에 대해 하나원 불평이 많았어요. 그때는 탈북민들을 99%, 거의 교회가 돌봤어요.

그러면서 북한은 우리와 다른 문화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의 비참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어요. 중국에서 잘 곳이 없어 산에 가거나 땅을 파서 자고, 먹을 게 없어 도둑질하고 시장 가서 주워먹고..., 매스컴에 나온 그대로였어요.

그때부터 10대들을 교육시키면 되겠다고 생각만 했어요.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르고 말이죠(웃음). 하나원 교육은 지속되지 않아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석 달이면 교육이 끝나 버리니까요.

더구나 그들은 평생 억압돼 있다 자유를 맛보니, 모든 걸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요즘 탈북민들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해요.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고,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김동식 목사님과 동역하던 같은 교단(예장 고신) 이서 목사님께 '학교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어요.

마침 천안 신대원이 조금 여유가 있다고 하셔서, 교사 6명과 학생 6명으로 학교를 시작했어요. 예장 고신 교단에서 매달 6백만 원씩 지원해 주셔서, 2011년까지 천안과 서울에서 학교를 운영했어요. 그런데 천안은 거리가 있다 보니 선교지향적 교육이 힘들어, 서울에서 교육을 집중하기로 했어요.

처음엔 남학생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오면 무서웠어요(웃음). 외모부터 아우라랄까 태도까지 너무 거칠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절대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라, 자존심이 너무 세요. 공부만 가르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탈북민들이 과연 어떤 아이들인지 분석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그룹홈을 시작했어요. 아무것도 몰랐지만 비전만 갖고 시작한 거죠. 처음엔 저도 힘들었고, 수행하는 교사들도 죽어났어요. 교사들을 통해 그들에게 아빠와 엄마를 만들어 줬어요. 교사들이 하루종일 일하고 저녁에 부모 노릇까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렇게 20년이 됐네요."

하늘꿈학교
▲방학 기간이라 잠시 비어 있는 하늘꿈학교 고3 교실. ⓒ이대웅 기자


-20주년을 맞는 소감은 어떠신가요.

"그 20년이 제게는 한 1년 같아요. 제가 1956년생인데, 아마 남들은 저를 불쌍하게 봤을지 몰라요. '이 아이들이 나중에 기독교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드리면, 목사님들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표정으로 측은하게 보셨어요(웃음).

하지만, 저는 저보다 이 아이들이 불쌍해요. 말할 수 없이 불쌍한 아이들이에요. 하지만 한 번도 이들에게서 선한 것이 나오리라는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어요.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웃음). 하지만 한 번도 제가 그 비전과 믿음을 잊은 적이 없다는 점이 참 신기해요.

저도 생각지도 못한 여러 문제들이 참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감사하고 복되다고 생각해요. 제 비전은 딱 두 가지였어요.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도대체 뭘까?' 하고 엄청나게 찾아다녔어요. 그때 큰 교회를 다녔는데, 저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였어요. 그래서 찾은 것이 해외선교였어요.

저는 교회 내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바깥의 시각으로 볼 때, 교회가 이상하게 느껴진 점이 많았어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도 이 땅에서 이뤄질텐데, 성부·성자·성령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양한 탈북민 아이들을 만나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던 것은 여기 서 있기만 하면 되리라는 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선교의 첫째가 복음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 미전도 종족에게 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같은 민족이고, 헌법적으로도 같은 국민입니다. 그러니까 들어오면 주민등록번호도 나오는 거죠. 그들을 만난 것은 너무 놀라운 축복입니다.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된 자를 돌보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거였구나 싶었어요. 무엇보다 제 믿음이 성장한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제 인생이 거칠겠죠. '왜 저런 일을 하지?' 하는 생각도 하겠지만, 저는 사실 그런 생각할 여유조차 없어요. 참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관심, 건축은 능력 밖 일
하나님 역사로 학교 건물 세워져
하나님 만나고 싶어 시작한 사역
뇌에 종양 있는 채로 20년 지내

-돌아보니 어떠신가요.

"여러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제 비전보다 훨씬 크고 깊고 놀랍게 역사하셨어요. 아이들을 기르는 것도 그렇고, 학교 운영도 그랬어요. 제가 하려던 것들은 잘 안 되고 상처와 고통만 남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어요.

지금 학교 건물이 이렇게 마련됐지만, 저는 사람에 주로 관심이 있어서 건물에도 별 관심이 없었어요. 재정도 부족했고요. 서울에서는 송파구 상가 2층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 훈련학교(MMTC)를 빌려 처음 시작했어요. 문짝도 맞지 않던 곳이에요.

하늘꿈학교
▲내부 복도에는 사물함과 함께 북한 지도가 놓여 있다. ⓒ이대웅 기자


탈북민들과 함께하다 보니 정부에서 높으신 분들이 많이 왔어요. 장관도 총리도 오셨는데, 소외계층 방문하듯 둘러보고 가셨어요. 하루는 밖에서 입학상담을 하러 온 탈북 모녀가 대화를 나누는데, '이게 학교네?' 이런 말이 들렸어요. 상가 건물 2층이다 보니, 학교 같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그때 아이들을 좀 더 좋은 시설에서 길러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능력 밖의 일이라 생각만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학교를 짓게 하셨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저는 능력이 없었어요. 교회들이 월 10-20만 원씩 도와주셨지만, 찾아다니면서 도와 달라는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저희 학교를 구제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싫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후원이 잘 안 됐고, 기도로 버티면서 왔어요.

지나고 보니 모세가 광야에서 고백하듯 하나님이 여기까지 안고 오셨어요. 신발도 해진 적이 없고, 못 먹은 적도 없고.... '하나님, 죽겠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막히면 관두라시는 줄 알겠습니다' 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또 어떻게 한 달을 보내지 하는 염려가 훨씬 컸어요. 학교 시작한 뒤로는 하나님의 비전은 고사하고 잠도 못 이룰 정도였는데, 포기하지 않은 것 자체가 신기해요.

저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어요. 그러다 가장 바닥을 쳤을 때 소위 말하는 주관적인 체험을 했어요. 그것이 있었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어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저는 그저 그 상황을 펼쳐놓을 뿐이었고, 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제 고백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학교를 시작할 때, 뇌종양 진단을 받았어요. 매일 울면서 '나는 이제 마지막이다. 학교를 할 수 있을까?' 김동식 목사님도 납북되시고, 이서 목사도 갑자기 돌아가셨거든요. 그런데 개교 직전 2월에 MRI를 찍었더니 종양이 눈에 띄게 작아졌어요.

그것보단 조금 커진 상태로 아직까지 살고 있어요. 역시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객관적 사실인 거죠. 건강도 재정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져갈 수 있는 건 믿음 하나인데, 이제 조금은 견고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헤매다, 지금은 하나님이 계시고 살아 움직이시고 저를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하늘꿈학교를 보면, 북한은 반드시 열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600명 이상 거쳐갔는데, 믿음도 좋고 건강하고 괜찮은 애들이 많습니다. 이들 중 십일조는 받아주셔야 한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더 급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