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던 시대 이후 기독교는 담론(discourse of the times)을 상실하고 있다. 기독교가 형성해야 할 시대 담론은 교회가 시대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정신과 문화를 주도할 수 있는 창조력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회가 존속해 온 방법이 끊임없이 시대정신에 걸맞은 신학적 응답을 해 왔기 때문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에 기독일보는 정기적으로 안지영 교수 (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와 함께 시대 담론을 제기하고 현대 교회와 목회자가 현장에서 고민하는 주제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려고 한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
현시대에 있어서 동성애가 공공의 적이 된 것은 어느 정도 성경적인 관점을 제대로 관철시키고 있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동성애에 대한 그릇된 편견과 왜곡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부인할 수 없다. 즉, 동성애자들이 필요 이상으로 반발감을 느끼고 인권을 빌미 삼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동안 (교회가) 그들을 비인간화 또는 무조건 마녀사냥식의 철퇴를 내렸기 때문이다.
"동성애적 성적지향"(Homo sexual orientation)과 "동성애 행위"(Homo sexual behavior)는 구분되어야 한다. 즉, 성경이 동성애적 성적 지향성까지 정죄하고 있는가 하는 논란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단순히 적대적이고 혐오적인 대상으로 정죄하는 틀에서만 작동된 것도 사실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의 구별은 분명하다.
그러나 태어나면서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 경우도 분명히 있다. 선천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통념과 문화적 환경 안에서 은닉된 부분이 터져 나온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주류 기독교 사회였던 미국의 대법원이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합법적인 권위를 허락한 탓에 소위 '동성애 신드롬'은 보편적인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교회, 구조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접근해야,
동성애, 낙태는 인권의 보호차원에서 필요하다는 논리가 더욱 우세하다.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사용 가치가 있기에 사회적, 법적으로 더 큰 문제가 동반되고 있는 것이다. 서구 철학에서 개인의 인권을 모토로 하는 논리에 이긴 정치적 프레임은 없었기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 재조명 필요한가,
창세기 19장에 나타나는 소돔과 고모라 폭도들의 행태가 동성애자를 심판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미 그들만의 성경주석, 성 소수자를 위한 주석 (QBC)에서 새로운 관점을 세상에 도전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 일단의 무리가 천사들을 방문한 이유는 성적인 접근 (sexual approach)이 아닌, 그들을 '조사, 검색' (וְנֵדְעָ֖ה Investigate, finding out) 하겠다 라는 의미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교회가 성경을 보는 눈을 더 확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동성애를 지지하고 옹호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처럼 좁은 식견으로는 그들과 대화조차 할 수 없는 편협한 식견에 묻혀 있을 뿐이다. 성경의 해석 관점은 방향을 정해 놓고 제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역사적으로 노예제도를 합리화한 남부 백인들의 신학적 교리에는 노아의 저주로 흑인이었던 함이 노예가 됨을 합리화시키는 논리로 사용한 바 있는 과오를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인지 백인보수주의가 강한 지역이 오랫동안 노예제도를 찬성한 근거가 된 것은 모순이 아닌가. 동일한 논리로 인간의 죄악된 모습과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벗어두고 인간적인 관점만으로 성경을 파헤치는 과오를 반복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계속)
(대담 정리, 편집국장 이창한 목사, 사진 나눔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