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민족주의와 신파적 드라마 제거는 개선
상처받은 자존심 기인한, 불완전한 역사 인식
성경, 이스라엘 괴로운 실상 있는 그대로 전수
미화된 역사, 하나님의 주권과 사역 인식 왜곡
박욱주 교수님의 이번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화제작 <한산: 용의 출현>을 다룹니다. 김한민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박해일(이순신), 변요한(와카자카 야스하루), 안성기(어영담), 손현주(원균), 김성규(준사), 김성균(가토 요시아키), 김향기(정보름), 옥택연(임준영), 공명(이억기), 박지환(나대용), 윤제문(구로다 간베에), 조재윤(마나베 사마노조), 박재민(와타나베 시치에몬), 김한민(권율) 등의 배우가 출연해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임진왜란의 실상: 조선의 명백한 패배로 평가되는 전쟁
<한산: 용의 출현>은 지난 2014년 개봉된 <명량>의 프리퀄 격인 작품으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김한민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명량>은 각본, 연출, 작품성 측면에서 전반적으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 악화된 한일관계 덕분에 시류를 타고 역대 한국영화 최대 관객 수를 기록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위안부 문제, 독도 영유권 분쟁, 그리고 점점 더 중국에 밀착되는 한국의 외교 스탠스 때문에 상당한 갈등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국내의 반일 감정도 높은 수준으로 치솟았는데, 덕분에 <명량>은 누적 관객 수 1,700만여 명이라는, 2022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한산: 용의 출현>은 전작에 대한 혹평을 감안한 듯, <명량>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민족주의 메시지와 신파적 드라마를 상당 부분 제거하고, 한산도 해전에 채택된 전술과 전투 상황을 영상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여러 영화평론가들로부터 전작보다 나은 후속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방적인 애국심 고취로 감동을 억지로 쥐어짜내는 것이 아니라, 한산도 해전의 전술적, 전략적 실상과 의의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해서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이 작품은 한산도 해전의 주요 승리 요소로 당시 전라좌수영을 지휘한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그 휘하 장수들의 단결심, 그리고 당파와 함포 운용에 유리한 조선의 판옥선을 지목한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가진 얼마 되지 않는 군사적 자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당시 조선군의 역량 대부분은 북방의 여진족을 견제, 토벌하던 북방군과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던 삼도 수군에 몰려 있었다.
이는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병력과 군사적 역량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일본의 관백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육군과 수군 병력을 모두 합쳐 약 20만을 조선으로 출병시켰는데, 이는 이제 막 전국의 통일을 눈앞에 둔 일본 전체 병력의 일부에 불과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그 20만을 타국에 보낸 상태에서도 관동의 도쿠가와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을 견제할 만한 힘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잉여 병력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그 잉여 병력의 무장도와 훈련도는 조선의 수준을 압도하고 있었다. 왜군은 100년 넘게 전국시대를 겪은 국가의 군대답게, 우수한 장수와 숙련병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은 성리학에 근간을 둔 극단적인 문치주의, 그리고 상공업 배척으로 인한 빈약한 재정 때문에 군사적 역량이 바닥까지 내려간 상황이었다.
양국의 이 극단적인 군사력 차이는 어이없을 정도로 빠른 도성 한양 함락으로 귀결되었다. 왜군의 보병 병력은 다대포 전투로 전쟁이 시작된 지 겨우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당시 부산에서 한양까지 가는 데 도보로 대략 보름 정도 걸렸던 것을 감안하면, 왜군은 제대로 된 반격을 거의 받지 않은 채 무인지경으로 한반도 남부를 돌파한 셈이었다.
▲영화 속 한산도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이 채택한 전투진형 학익진 묘사. |
◈임진왜란과 역사: '대첩' 중심의 민족주의적 역사인식
조선 도성이 어이없는 속도로 함락되자, 당시 조선의 상국이었던 명국 조정은 조선이 일본과의 뒷거래를 통해 요동반도로 침략해 오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곧 선조가 명국과의 접경지인 의주까지 피신해 구원을 요청하면서 비로소 일본과의 작당 의심은 사라졌지만, 이후로는 조선의 통치방식에 대한 명국의 신랄한 질타가 이어졌다.
당시 명 조정과 지식인들의 비판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미 명에서는 구시대 유물이 된 성리학(명에서는 양명학이 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과 극단적인 농본 정책에만 매달려 상공업 발전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로 인해 재정 확보가 되지 않아 군사적 역량이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전황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은 명군이 조선을 도와 참전한 이후 일이다. 결국 임진왜란은 만일 조선 자체의 군사적 역량만으로 버텼다면, 나라가 멸망에 이르렀을 것이 거의 확실했던 전쟁이었다.
한반도 남부 해상에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분전 또한, 명의 원군이 없었다면 그 의미가 반감되거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만일 조선 조정이 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멸망해 버렸다면, 고립된 조선 수군은 나라 잃은 군대였던 삼별초의 운명을 그대로 답습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조가 1592년 6월 의주로 피신했고 한산도 해전은 두 달 뒤인 8월에 벌어졌으니, 그 와중에 선조와 조선 조정이 왜군에 붙잡혔으면 조선 수군 장수와 병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마지노 요새에 주둔했던 프랑스군과 같이 자동적으로 패전병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심지어 선조는 의주에 도착한 직후인 6월 22일에 명국으로 망명을 신청했고, 6월 27일에 이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군주가 국가의 멸망을 직감하고 아예 나라를 버리고 떠나려 했던 것이다.
이 시도는 조정 대신들의 결사반대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당시 조선 조정이 멸망 직전의 상황이었으며 임진왜란은 초장부터 조선이 일방적으로 패배한 전투였다는 사실이 이를 통해서 입증된다.
▲<한산: 용의 출현>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박해일 분). |
그렇다면 <명량>과 <한산: 용의 출현>과 같은 영화는 조선의 패배가 명백했던 임진왜란을 둘러싼 우리 역사의 어떤 부분을 조명하고 있는가?
바로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이 짓밟혔던 사실, 그리고 그 수치심이 무려 400여 년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이 수치심이 그토록 긴 시간 연장될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 초 재개된 일본의 침략, 즉 일제강점기의 기억 때문이다.
한산도 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이순신 장군이 커다란 승리를 거둔 전투들은 임진왜란 당시 전체 전황의 암담함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 그래서 '대첩'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도저히 판을 뒤집기 어려운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대승을 거뒀기에 대첩이라는 칭송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 <명량>과 <한산: 용의 출현>에 표현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신격화에 가까운 존경심은 순수하게 한 위대한 군사 지도자를 기리려는 것이라기보다, 한국인의 상처입은 자존심과 서글픈 감정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전체의 실상은 외면한 채,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장면만 거듭 되새기는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이렇게 민족적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 역사의 국소적인 부분만 바라보는 태도, 특히 성공과 승리의 장면들만 바라보려는 태도는 해당 민족의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초래한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전반적으로 성공과 승리보다는 고난, 실패, 역경, 그리고 불신앙으로 가득차 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로 보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아래 평안과 번영을 누렸던 시기는 지극히 짧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기는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초래된 저주와 고난의 세월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은 조상들의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쳐다보기조차 괴로운 행적을 있는 그대로 적어 대대로 전수되도록 했다. 왜냐하면 사실과 다르게 미화된 역사는 역사적 현실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역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한산: 용의 출현>이 <명량>에 비해 신파적 요소를 훨씬 줄이고 전투의 역사적 실상에 주력한 점은 분명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연출 방향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첩'에만 몰두하는 역사적 태도는 한국 영화가 비틀린 민족주의 성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는 우리의 온전한 역사인식에 결코 유익할 것이 없는 태도이다. <계속>
▲왜군의 주력 전투함 세키부네에 대해 당파를 시도하는 귀선(거북선).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