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수 목사
(Photo : 기독일보) 이준수 목사

캐나다 밴쿠버에 사는 내 고등학교 친구가 동부 퀘벡으로 출장을 다녀왔다고 한다. 몬트리올 뿐 아니라 스키장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몽 트헝블렁(Mont Tremblent)'에도 들려 멋진 경치를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산 전체가 푸르른 신록과 형형색색 고운 꽃들로 덮인 것이 엄청 아름답고 웅장한 느낌이었다. 이곳 캘리포니아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 같은 전경에 나도 조만간 퀘벡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원래 캐나다는 16세기 후반 '자크 카르티에'라는 프랑스 탐험가에 의해 발견되었고, 수많은 프랑스 상인들이 원주민들과 모피 교역을 하러 몰려들어 국토의 거의 전 지역이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었는데, 18세기 중반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강대국들이 벌인 '7년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는 바람에 지배권이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에 프랑스는 영국에 보복하고자 미국 독립전쟁에서 식민지군을 적극 지원하였고, 퀘벡 지역에 살고 있던 프랑스계 주민들도 영국 정부의 통치에 반발하여 300년 넘게 독립을 요구하며 그들의 언어와 종교, 문화를 지켜오고 있다.

특히 이 퀘벡 주민들은 자동차 번호판에 "Je me souviens"이란 문장을 꼭 써 붙여 다닌다고 한다. "Je me souviens"은 불어로 "나는 기억한다"라는 뜻으로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 문화를 절대 잊지 말고 항상 간직하자는 의미이다. 과거에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면 현재 무엇을 해야 하며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지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본국을 떠나온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프랑스인이라는 데에 강한 자부심이 있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 전통을 철저히 지켜온 것에 대한 대단한 긍지를 이 세 단어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1

이러한 퀘벡 지역 프랑스인들의 민족과 문화에 대한 강한 긍지와 자부심은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교포들에게도 큰 도전과 자극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겉으로 보기엔 우리의 민족과 문화에 대해 강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교포들이 미국에 이민와서도 한국식으로 살며 말도 항상 한국어를 쓰고 음식도 주로 한식을 먹는다. 또 같은 지역에 함께 모여 살며 한국의 문화와 전통, 예의범절을 지켜오고 있다. 특히 요즘은 인터넷, 스마트폰 등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한국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유행하는 최신 문화들이 빠르게 유입되고 있다. 또 한인교회의 예배형식과 선포되는 메시지의 내용도 본국 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실로 몸만 태평양 건너에 와있을 뿐 한국과 거의 동일한 문화권, 생활권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한국의 소식과 문화를 너무 쉽게, 자주 접하다보니 미국에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와 가치가 희미해질 때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말을 쓰고 한국음식을 먹으며 한국 문화를 쉽게 접한다고 해서 우리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참다운 민족적 정체성이란, 앞에서 언급한 퀘벡 주민들의 말처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분명히 인식하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정확히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인데, 우리 미주 한인들의 경우 이 점이 좀 부족한 것 같다. 우리가 왜 이 땅에 왔으며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못한 채 그저 지금보다 생활이 나아지기만을 바라며 막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소수 이민자로서 겪어야 하는 각종 제악과 차별, 힘들고 고단한 삶 때문에 미래에 대해 더 큰 꿈을 꾼다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이미 우리가 이 미국 땅에서 백 년 넘게 살아왔고 앞으로 우리 자손들도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뿌리를 내릴 터전인 만큼 이제는 우리 한인 전체가 함께 추구하며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공동의 목표와 가치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의 목표와 가치관을 세우는 일에 우리 한인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앞장서주길 바란다. 단순히 개별교회의 성장이나 전도와 선교의 차원을 넘어 우리 전체 한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나라의 임재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포괄적이고도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주는, 폭넓은 신앙과 식견을 지닌 목회자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신앙과 삶이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삶을 통해 신앙이 입증되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며 미래의 후손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요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디아스포라'란 단순히 흩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몇 개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며 또 서로 연합하여 보다 큰 역사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도 슬퍼하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 그 열악하고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을 믿고 최선을 다 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기에 에스더, 다니엘, 느헤미아, 에즈라 등 위대한 인물들이 등장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마침내 무너진 조국을 회복시키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이 지녔던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확고한 자존감과 사명의식은 이후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전 세계를 떠돌아다닐 때에도 이스라엘 민족 고유의 민족성과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민족이 맡았던 이러한 사명자의 역할을 우리 미주 한인교포들도 감당할 수 있길 바란다. 우리가 소수 이민자로 이 미국 땅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지만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등지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 비하면 우리는 큰 축복을 받고 있다. 역사적 불행으로 인해 다른 지역의 한민족 동포들이 무수한 고난과 시련을 겪은 것에 비해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너무나 풍성한 혜택과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축복들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느헤미아 선지자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의 자손이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한민족을 하나로 모으고 그 역량과 능력을 결집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전 인류를 위해 위대한 공헌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요 현재 이 땅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기억한다! 부디 자신이 처한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신앙과 삶의 안목을 한 단계 높여 우리가 걸어온 과거와 현재를 폭넓게 통찰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과 지표를 확고하게 세워나가는 우리 미주동포들이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글 | 이준수 목사 (남가주밀알선교단 영성문화사역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