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선교사들과 한국 초대교회 목회자들,
조선 시대 온갖 차별과 악습 개선 노력 나서
침략하고 핍박한 일본인들까지 선교 지속해
차별없이 구원과 은혜의 진리 전할 소명 감당

◈기독교와 차별의 극복: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의 현실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의 핵심 주제는 '부당한 차별에 대한 저항'이다. 그런데 <파친코>의 서사 안에서 '부당한 차별'이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강요하는 차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자의 가족, 특히 선자 어머니 양진(정인지 분)과 선자에 대한 여성차별 문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영국계 은행에서 동양인 직원으로 일하는 솔로몬(진하 분)이 당하는 인종차별 역시 비중 있게 묘사되고 있다.

즉 <파친코>의 차별은 단순히 식민지 조선과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받는 차별에만 일차원적으로 집중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을 넘어, 20세기를 살아가는 한 한국인 가족, 특히 서로를 끔찍히 아끼는 모녀에게 가해지는 다차원적인 차별의 매트릭스를 복합적으로 묘사하려 노력한 작품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원작 소설 <파친코>의 이민진 작가가 어린 시절 이민을 간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20세기 한국 역사를 바라볼 때, 한국과 미국 양측 시각을 동시에 반영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파친코>는 작가의 이런 복합적인 시각 덕분에 한국 특유의 자국 우선주의에 경도되지 않은 채, 한국 민중이 감내해 온 차별의 문제를 다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파친코>의 서사 안에 다중적으로 얽혀 있는 차별의 굴레에 저항하는 요소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애절한 모정(母情)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신앙이다.

선자의 어머니 양진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신분 낮은 여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산 경험이 있고, 그 딸 선자(김민하 분)는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유부남 한수의 이기심 때문에 극단적으로 보수적 사회환경 속에서 미혼모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다.

이 때 양진과 선자를 동시에 구해주는 이는 개신교 전도사 이삭(노상현 분)으로, 이삭은 두 모녀가 자신을 구해준 데 대해 편견 없는 감사함을 가지고 결국 선자와의 결혼을 통해 어려운 처지를 함께 헤쳐나가는 동반자가 되어준다.

선자와 함께 오사카로 건너온 이삭은 양진과 선자에 대해서만 아니라 그곳에서 극심한 차별과 노동착취로 고통받는 한국인들에게 전도하며 힘이 되어주려 한다.

이처럼 이삭은 패망해 버린 나라의 운명 때문에 각양 차별의 굴레에 짓눌려 있는 이들에 대한 차별 없는 기독교적 박애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절, 기독교 선교사들과 국내의 교역자들은 일본에 의한 강압과 차별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온갖 차별의 악습으로부터 한국의 민중을 구해내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그리고 압제자인 일본인들에 대해서도 선교 노력을 지속했다.

이렇게 민족의 울타리를 초월하는 박애와 자비의 실천은 다른 종교들로부터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만백성에게 차별없이 구원과 은혜의 길을 여는 진리를 전하는 소명은 기독교 고유의 특수성이다. <파친코>는 이런 특수성을 이삭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파친코
▲양진과 선자 모녀의 도움에 보답하는 개신교 전도사 이삭. <파친코>의 서사 안에서 부당한 차별의 현실에서 고통받는 한국인들에 대한 기독교적 박애와 헌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기독교와 선민의식 철폐: 일본 특유의 폭력적 선민의식에 저항한 기독교 신앙

세상 모든 국가와 민족은 자국 우선주의 혹은 자민족 우선주의를 내세운다. 제국주의적 횡포를 저질러 온 강대국과 식민지로서 압제받던 약소국, 어느 편이든 상관없이 부족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나라가 없다.

그리고 이 자민족 중심주의는 이방인, 외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일본인들 또한 고대로부터 강력한 자민족 중심주의를 조장하고 강화해 왔다. 신토의 최고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직계 후손인 일왕가 야마토 가문의 지배를 받는 신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일본 고유의 선민의식을 형성하는 역사적 배경을 이룬다.

이러한 종교적 선민의식은 19세기 일본 민족주의를 고양하던 '고쿠가쿠(國學)'에 의해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로 구체화된다. 야마토다마시이란 '일본인다운 집단의식과 충성심' 정도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일본 특유의 종교적 민족주의 정신은 보신전쟁(1868-1869)과 메이지 유신(1868)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강한 군국주의 색채를 띠게 되고, 동아시아 전역을 일본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정치 이데올로기인 대동아공영권 사상으로 발전된다.

그리고 여기에 오리엔탈리즘까지 가세하면서 일본인들의 선민의식은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 근대화 당시 일본인들은 영국과 독일 등 당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선진 문물에 대한 강한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국격이 제국주의 열강 수준 혹은 그 이상으로 높아졌다는 자부심과 함께,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공유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인들을 제외한 아시아 각국의 민족을 멸시하는 풍토가 일본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파친코
▲일본 내에서 극심한 착취와 차별에 고통받는 한국인들을 돕는 데 힘쓰는 전도사 이삭.

드라마 <파친코>에 묘사된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과 착취는 바로 이런 일본 특유의 종교적·정치적 선민의식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선민의식에 깊게 물든 일본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소극적으로든 아니면 적극적으로든 배척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진정성 있는 기독교 선교사와 교역자들은 민족 간 차별의 울타리를 분쇄하는 무차별적인 박애와 선교의 열정으로 선교지의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다.

이런 헌신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섬김을 받으실 수 있는 분이며, 그 아래 전 인류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할 가련한 영혼들로서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을 근원적인 격의 차이가 없는 평등한 존재자들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반면 신토의 인간 이해는 일본인들의 민족신 아마테라스 아래 일왕가가 있고, 그 밑에 일본인들이 있으며, 그 아래 전 세계의 다른 민족들이 있다. 한 마디로 인간 대 인간, 민족 대 민족 간에 확고한 계급적 격차가 있고, 그래서 하위계급에 대한 상위계급의 폭력과 압제가 자연스럽게 정당화된다.

이런 선민의식을 위협하는 모든 사상과 신앙에 대해 적개심을 갖도록 만든다. 한국의 기독교계가 신사참배 강요라는 폭력과 굴욕으로 인해 커다란 고통을 당하게 된 것도 바로 신토가 가진 이런 우월성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 때문이다.

한국 또한 전통적으로 나름의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다. 바로 소중화(小中華) 의식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 선민의식의 기둥 역할을 하던 중국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패망의 길을 걸으면서, 그리고 그 여파로 조선 역시 패망의 길을 걸으면서 소중화의식에 환멸을 느낄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국 특유의 선민의식이 무너진 틈에 참된 인류 평등과 차별 철폐의 정신을 실천하던 기독교 신앙에 큰 감화를 받게 된다.

드라마 <파친코>의 서사는 바로 이런 기독교적 차별 철폐의 신앙과 정신을 기반으로 한국인들을 바라본다.

해방 이전에는 일본 제국의 노예로서,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일본 사회의 이방인이자 약자로 전락해 버린 한국인들과 재일교포들에 대한 동정과 박애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서사의 바탕에 자리잡고 있다.

덕분에 <파친코>라는 작품은 오로지 '한국인들이' 일제에 억압을 받았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단편적이고 일차원적인 민족주의 시각을 벗어나 식민지 치하의 약자들,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의 다중적 측면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또한 모든 민족을 짓누르는 부당한 차별의 현실을 극복하게 해주는 힘이 기독교 신앙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파친코
▲드라마화 이전, 소설로서 미국에서 평단의 평가와 상업적 성공 모두를 이룬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