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래함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를 만나기 위해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으로 날아간 것은 2019년 12월5일이었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 주최한 'Love Phnom Penh Festival' (2019년 12월 6-8일)에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자격으로 참석했지만 내심으로 별도의 출장 목적을 갖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평양과기대 국제학교 건립을 위한 상담을 하기 위해서다. 대회 기간 중에 짧은 시간이지만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와 대담할 기회를 가졌다. "목사님, 평양과기대 안에 국제학교를 세워 주십시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제가 얘기듣기로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도 평양 국제학교 설립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걸로 압니다. 목사님의 어머니 루스 벨 그래함 여사께서는 평양에서 외국인학교를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어머니께서는 학생 회장까지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목사님을 만나 뵙고 이런 비전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달려 왔습니다. 북한내 유일한 국제대학인 평양과기대 안에 국제학교를 세워서 외국인 교수들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평양시에 거주하고 있는 외교관, 기업인, 구호단체 주재원의 자녀들도 함께 공부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사전 협의 없이 불쑥 제안한 일이지만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께서는 그 취지에 공감하고 다음해(2020년) 서울 전도대회 때 만나서 실무협의를 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020년 2월 코로나19가 발생한 이후 국내외 모든 통행이 단절됨으로써 결국 빌리 그래함 서울 전도대회가 무산 되고 말았으며, 그후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와의 대화도 끝내 중단되고 말았다.
루스 벨 그래함은 중국 화이안(Huai'an)에서 의료선교를 해온 넬슨 벨 선교사의 세 자녀 중 맏딸이다. 그녀의 부모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이후 '극동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으로 이주하여 선교 활동을 계속했고, 루스 벨 그래함은 1930년대 평양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그후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마친 후 1943년 빌리 그래함 목사와 결혼 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1940년대에 '사마리안 퍼스(Samaritan's Purse)'의 설립자 밥 피어스 목사와 함께 YFC(Youth For Christ)라는 청소년선교단체의 전도자로 한국 고아원을 처음 방문했으며, 1951년 방한 시 이승만 대통령을 접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역사상 가장 많은 110만 명 청중이 모였던 복음 전도대회를 인도했으며 그 대회는 선교한국의 위상을 높히고 한국기독교를 세계화 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후 빌리 그래함 목사는 1992년, 1994년 2회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독대했으며 김일성 주석에게 성경책을 선물하기도 했고 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미국 내 종교의 영향'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그는 학생들에게 연설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그렇게 된 연유에는 부인 루스 벨 그래함 여사의 평양 외국인학교 출신 경력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는 두 개 기관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1998년 밥 피어스 목사가 소천한 후 '사마리안 퍼스'의 대표가 되었으며 2000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의 대표도 맡게 되었다. 후자는 전도기관이고 전자는 구제기관으로서 이 두 기관이 서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사역과 구제사역을 동시 다발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는 2000년에 처음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을 기념하여 세운 칠골교회에서 설교한 이후 여러 차례(4회) 평양을 방문했으며, 그가 대표로 있는 '사마리안 퍼스'에서는 의료시설과 이동진료소 지원, 의료진 교육, 홍수피해 지원 등 다양한 구호 활동을 펼쳐왔다.
대를 이어 끊임없이 이어온 그래함 일가의 북한 사역은 남다른 바가 있는데 그 뿌리와 영향력은 단연코 어머니 루스 벨 그래함 여사의 북한 사랑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7년 북한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평양에 갔을 때 '조선의 딸'로 환영을 받으며 청소년 시절 공부했던 외국인 고등학교를 방문했었다.
그때 그녀의 심경을 한번 헤아려 보자. 그후 그의 남편과 자식이 북한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하고 지원하는데 힘을 쏟은 건 인간적으로 보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가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평양에 국제학교를 세우는 일을 적극 추진해 주기를 바라고, 기왕이면 남북합작 국제대학으로 설립된 평양과기대 안에 학교를 세우면 그 의미와 교육 기능이 한층 더 부각되리라는 점이다.
2019년 12월, 무리를 해서라도 프놈펜으로 날아가서 그를 만나려고 했던 사유가 여기에 있었고, 그리고 그를 만났다. 그러나 결국 코로나19로 인해 2년 가까이 아무런 진전도 없이 꿈은 표류하고 있었다.
기적의 시작인가? 작년 11월 중순경 '사마리안 퍼스' 서울대표부의 크리스토퍼 대표가 나의 양재동 사무실을 전격 방문했다. 평양과기대 총장자문단을 이끌고 계시는 백성기 전 포스텍 총장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김현수 이사와 함께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왜 프놈펜에 다녀왔는가를 자세히 설명했다.
또한 대학의 현황과 중장기 발전계획에 대한 신임 총장으로서의 포부를 피력했다. 특히 지난 9월에 파라과이 출장을 다녀오는 과정에 브라질 씨다지교회(City Church)의 깔리토 목사와 나눈 대화를 계기로, 대학 캠퍼스 안에 '외국인문화센터'를 세우고 거기에 국제학교를 병립하려는 계획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실제로 나는 파라과이를 다녀온 후 동숭교회 서정오 목사님께 부탁드려 그 교회 장로로 계시는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를 만나 기본설계를 의뢰해서 작업 중에 있었다. 일차 기본 설계안으로 나온 청사진 도면을 크리스토퍼 대표에게 보여 주면서 북한의 다음세대를 위한 비전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것이 그분의 마음을 터치했던 것일까?
나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고 믿는다. 크리스토퍼 대표는 그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사마리안 퍼스' 본사에 이 프로젝트에 대한 건의서를 보냈고, 연말에 크리스마스 휴가 차 미국 본사로 가서 한 달간 있는 동안 내부적으로 상당히 긍정적인 검토를 하고 있다는 전언을 들었다.
아, 가슴이 떨린다. 2000명 수용 규모의 다목적 강당과 국제학교 및 외국인 예배당과 종합예술관이 한데 어울어진 복합시설 - '외국인문화센터'가 세워지면 이는 곧 북한의 다음세대의 국제화와 미래 진로를 위해 교육문화사역의 한마당을 이루는 매체공간이 되어 줄 것이다. 거기서 학생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노래하고 뛰놀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떨린다.
앞으로 이 일이 어떻게 진전될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막에 강을 내고 광야에 길을 내시는 능력의 손으로 우리 앞에서 기치를 들고 나아가실 것을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