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혹 우리 목사님은 독재자라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양떼를 데려다 맡기셔서 책임을 지게 하시는데 이 양떼로 진리와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게 일러줘서 믿음으로 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적 사명에 입각하여 그 양떼가 제 구실하면서 그 교회를 향한 뜻을 이루어드리는 일에 목자와 더불어 합심전력하게 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얻게 해야 합니다.
7절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너희를 인도하던 그 목사의 행실, 즉 그가 설교하던 내용대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지, 그가 양떼에게 지시한대로 하나님 뜻을 받들기 위하여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는지를 주의해서 보라고 하십니다. 그 목자가 하늘나라 영광스러운 자격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육신의 남은 때와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총 동원해서 섬김의 제물되기를 힘쓰는지 주의 깊게 잘 살펴보고 강단에서 설교하는 내용대로 생활을 엮어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영적소망의 영광스러운 결실을 위하여 생애를 바쳐 수고와 봉사와 헌신을 아끼지 아니하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 그 사람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목자와 양떼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묶어주신 관계입니다.
한 영혼이 등록을 하게 되면 그 영혼에 대해 기도하며,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살펴 보살피는 것은 그 영혼을 천국에 들어가게 해야 하는 책임목회의 사명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자기생각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가운데 모세의 특별한 지시가 없어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이처럼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의 광야생활이 곧 여러분들이 죄악세상을 빠져나와 진리의 교회에 속하여 함께 천국에 가고자하는 신앙생활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도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갈 길을 지시하고 성령을 보내주시어 믿어지는 믿음으로 더욱 담대함을 더하여 주시며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 역사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들을 통하여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만 대언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가 성령에 사로잡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7절 말씀은 이처럼 하나님의 영인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 말씀만을 대언하는 목사를 본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을 인도하던 자'라는 것은 헬라어로 '헤게오마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너희를 다스리는 자, 지배하는 자, 인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양떼에 대한 주권을 그를 인도하는 목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맡겨진 양떼를 지배하고 통솔하여 책임지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영도자(에게오마이)로 세우실 때 하나님은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의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수1:5-6)"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비교해서 여호수아에게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이 대신 채워 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호수아 3:7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권위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카리스마타라고 합니다. 카리스마(charisma)는 사전적 의미로는 대중을 심복시켜 따르게 하는 능력이나 자질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영적권위를 의미합니다. 이 영적권위란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시면 모세가 대언하여 말할 때 백성들이 모두 아멘으로 받고 순종했듯이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게 하시면서 여호수아에게 말씀주시면 그 백성에게 대언할 때에 하나님께 복종하듯이 여호수아에게 복종하도록 영권을 주신다는 약속이십니다.
요한복음 21:15-17에 보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하십니다.
이 말씀 중에서 두 번째 내 양을 치라하신 것이 '헤게오마이'입니다.
아직도 목사를 독재자라고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는 여러분들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목사는 하나님이 하라 하시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모습으로 목회를 해야 할지 여러분들의 입장을 따라가야 할지는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의 모습으로 목회를 해야 양떼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각기 형편과 처지가 다릅니다. 그런데 자기의 생각과 형편에 맞추어 달라고 자꾸 떼를 쓴다면 그것은 지옥으로 가는 목회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절대주의 신앙으로 목회를 하게 된다면 지옥으로 가던 사람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정신차리게 해서 하나님 앞으로 이끌려갈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천국가는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
9절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사는 목적과 방법은 항상 목자를 통하여 영적소망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힘써야지 육신이 먹고 사는 일 핑계하고 세상에 빠져들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늘나라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핑계 삼아 주일도 지키지 않고 교회에 정해져 있는 각종 예배에 불참하는 것은 참으로 바보같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지, 입을지, 마실지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걱정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 할 걱정일 뿐이고 진리와 성령으로 거듭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에 이끌려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며 신앙생활에 힘쓴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고 꼭 필요할 때에 챙겨 주시게 되어있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하나님이 항상 넉넉히 섬기고 남을 수 있도록 책임져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도 택하신 자기백성을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양이 되셨고 그 몸은 예루살렘 영문 밖에서 십자가 형틀에 못 박히어 죽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내가 감당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영문 밖으로 예수님이 죽으신 자리를 찾아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로 하늘소망의 믿음을 가꾸어야 하고 예수님처럼 더 많은 영혼을 하늘나라 가게 하는 성과를 위하여 숨질 때까지 생애를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기를 작정하고 헌신과 희생을 다해야 합니다.
14절에 보면 우리가 영원히 살 도시가 없다고 합니다. 결국 장차 올 것을 찾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천국을 찾고 그곳에 들어갈 목적으로 믿음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천국 가는 것이 자기생의 궁극적 목적이어서 더 나은 영광스러운 자격으로 가야겠다는 소망과 목표가 있다면 이 세상의 유혹을 좇아 휘청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을 향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고 감사해서 감사와 찬송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 헌신하여 봉사할 것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더 기쁘게, 영화롭게 할 것들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함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진정한 하늘소망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16절 말씀과 같이 어디를 가든지 자신을 높이려하지 않고 주변사람들을 보살피고 그가 더 은혜받도록 도와주고 사랑을 베풀고 말 한마디라도 의욕을 북돋우어 주는 것이 하늘소망 영광스러운 결실을 목적으로 믿음생활하는 성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17절은 목회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세우고 그 목회자에게 당신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바랍니다. 목회자가 당신을 진리와 성령으로 깨우쳐서 회개하고 거듭나 구원을 얻게하고 과거에 마귀와 짝하여 죄악을 일삼던 구습이 재발하지 않도록 말씀의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다시 지옥으로 나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목회자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그 목회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실천하고 살아가게 될 때 예수님 닮아가며 하나님 앞에 엄청난 영광의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떼가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그것이 마치 목자의 잘못으로 여겨 경성(깨어 반성하다)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양떼를 진리로 이끌지 못했음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또한 목회자가 즐거움으로 목회를 하게하고 근심하는 대상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결코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양떼 중에는 소망적인 기대감을 주는 양떼가 있는 반면에 근심을 주는 양떼도 있습니다. 목자로 하여금 양떼를 바라볼 때 참으로 보람 있고 그 같은 믿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을 만큼 의욕이 샘솟게 하는 양떼는 소망이 있고 하나님 앞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올바르고 참된 목회자는 독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께 복종하여 교회와 양떼를 이끌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간혹 사적으로 좀 봐주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목사인 나도 하나님의 매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심이 인간인 목사가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것에 비기겠습니까.
모세도 여호수아도 그랬듯이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그 양떼를 하나님 뜻을 따라 이끌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양떼의 유익을 위한 신앙지혜는 목자를 대할 때에 하나님 대하듯이 하는 것이 그 양떼에게는 천만배로 유익이 됩니다. 그리고 그 입술의 말씀을 백프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에 그 양떼에게는 엄청난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목회방침에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협력하고 봉사하여 목자의 손발노릇 잘해서 은혜 분위기를 조성하고 한 영혼이라도 구원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전도해 옴으로 교회가 힘 있게 성장하면서 세계선교에 더 큰 몫을 감당할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가면 영광의 면류관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