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두 차례에 걸쳐 일부 기독교인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무속정치·비선정치를 염려하는 그리스도인 선언문'을 발표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필자는 무엇보다도 그런 행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걸고 행해졌다는 것이 매우 유감스럽고 경악스럽다. 그리고 이 선언문의 발표가 취재 윤리에 위반된 녹취록을 바탕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에 재차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선언문 내용 또한 국회에서의 발표 형식을 반영하듯 인본주의적이고 피상적인 색채가 강했다. 즉 진정한 신앙적 이슈를 담기보다, 특정 후보 부부에 대한 공세적 논조의 편향적이고 노골적인 정치 행위적 발언이란 인상을 받기에 족했다.
이에 두 선언문의 내용상 공통적인 부분을 종합해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열거해 보고자 한다.
1. 녹취록
위 선언문에서 차기 정권의 무속정치와 비선정치를 염려하는 이유는 녹취록에 근거해 야당 후보의 부인 김씨와 주술적 무속인들이 후보에게 큰 영향을 미쳐왔을 거라는 짐작과 앞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추측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짐작과 우려는 어디까지나 상대를 속여 친분을 가장해서 사적 담화를 편집한 자료에 기반한 것이기에, 주관적이고 억측적인 소지가 다분하다는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김건희 씨의 녹취록은 내용의 진위와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녹취록 자체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이용 가치에 목적을 삼는다면 몰라도 사사로운 담화 수준 이상의 가치를 두기엔 무리수가 따른다고 본다.
한편 점을 보고 무슨 운수에 대해 듣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 고시에 붙는다든지, 검찰총장이나 대통령이 된다든지 하는 예언들이 어떻게 고시공부나 검사직 수행이나 후보 경선이나 유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겠는가? 도움은커녕, 오히려 구설에만 오르는 현실이 아닌가? 개인의 운명이나 국운이란 것도 내막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이슈화로 삼는 "내가 정권을 잡으면"도 "내가 (남편이) 정권을 잡으면"으로 얼마든지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간단히 정권욕의 화신으로 둔갑시키는 현실이니 이 얼마나 부실한 자료가 낳은 넌센스인가?
김씨 역시 여느 아내처럼 남편의 일에 대해 귀동냥으로 듣거나 유추하면서 자신의 지론이 생길 법도 한 것이다.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남편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말이 통할 것 같은 친구같은 제3자에게, 그간 자신이 터득한 바나 간직했던 속 생각을 자유롭게 힘을 실어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볼 때, 녹취록의 정당성과 공적 가치를 달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법원은 그녀가 공인인 후보 부인이란 이유로 그녀에게 사사로이 말할 수 있는 자유에 족쇄를 채웠다.
녹취록에 대한 후보 측의 공식적 사과는 이미 수차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위 선언문에서 후보 측에게 계속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의외적이고 무례한 태도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류의 강경한 공식적 사과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해야 할 대상은 정치 사회의 특정 후보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루밍 같은 불의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묵과하는 교회 사회의 특정 신앙리더란 생각이 안드는가?
첨언하자면 김씨의 미투에 대한 폄훼성 발언은 그런 불행을 겪어보지 않은 여성 일반의 견해일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성도덕적 지형을 반영하는 발언인 만큼, 시간과 인식의 전환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을 통한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본다.
2. 도대체 무엇인가?
필자는 위 선언문에서 "접신한 한 여성의 '힘' 사용설명서" 운운하는 자체가 선언문에 동참한 사람들의 성경 이해나 목회관 또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의심할 만큼 심각한 문제를 노출시켰다고 느낀다.
성경적 그리스도인이란 늘 삶 속에서 '세상 영'을 분별하고 '세상 영'에 대적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대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개 비기독교인 식자층들 중엔 학구파일수록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유독 주역에 정통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이들은 점집에 안 가도 스스로 점을 보고 남들도 잘 봐준다. 김씨만 특별한 게 아니다.
필자는 전에 우연히 강남의 한 정신과 의사를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필자에게 건넨 첫 물음은, '생년월일시가 뭐냐'는 거였다. 그는 단 몇 초도 안되어 모니터를 통해 필자의 과거와 미래의 재정 상태에 대해 시원시원하게 말을 해주었다. 실로 상식의 허를 찌르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생활이 궁색한 전도자라면 아마도 그런 선지자(?)에게 복음을 꺼내드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을 잘 알아야 한다.
위 선언문에서 "무속인들이 괴력난신이 되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 또한 참으로.특이한 것이 '괴력난신'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적 세계를 무시한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로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거나,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땐 신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행해라'등 귀신을 잘 다루는 지침도 함께 나오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공자를 본딴 조선시대 유림들이 무속신앙과 불교, 후대에 들어온 천주교를 향해 공격할 때 쓰여진 것이라는데,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유림처럼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참 코믹하다.
예수님이 언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헛기침을 하고 팔짱을 끼고 엄히 호령하며 전도를 하라고 하셨는가?
3. 엘리야의 맞대결
한편 평범한 여염집 아낙 출신의 김씨를 무속의 괴력을 지닌 인물로 정조준하여 자칭 그리스도인 800여 명이 항쟁하는 모습은, 엘리야 선지자 한 사람이 850명의 이방신 선지자들과 맞대결하던 모습과 아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엘리야 선지자는 어떻게 맞대결했는가?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가 어떤 식으로 저들과 맞대결 할 것을 분부하셨나? 하나님은 먼저 엘리야에게 직접 아합왕을 찾아가 독대하라고 이르셨다(열왕기상18:1).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미워하는 아합왕을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전했다. 그리고 아합 왕에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갈멜산에 집합 시키도록 요청했다(열왕기상 18:19-20).
현 상황에 적용하자면, 하나님께서 한국의 빌리 그래함 같은 주님의 사역자를 부르셔서 대선 후보를 독대하게 하신 것이다.
주의 종으로 하여금 대선 후보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여 후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시고 대선 후보를 통해 무속인들에게 복음을 체험할 기회를 여는 사역을 하게 하신 것이다.
아합 왕에 의해 갈멜산에 모여든 백성들의 무리 앞에서 엘리야가 어느 쪽을 따를지 택하라고 성급하게 보이스를 냈을때 무슨 일이 생겼나? 그때 정작 엘리야에게 돌아온 응답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열왕기상 18:21).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시는 '세상 영'에 대항하는 맞대결 방식은 보이스만 크게 내어 사람들을 선언적으로 선동하는 방식이 아니다. 즉 대선 후보 부부를 정조준하여 신앙의 이름으로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국민들을 선동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맞대결에 승리하게 하시는 방식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 방식이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열왕기상 18:30,32)."
제단 수축은 곧 응답을 구하는 열렬한 기도 행위를 뜻할 뿐 아니라 우리 안의 지성소의 은혜의 속죄소에서 만난 주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방식을 뜻한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 하옵소서 내게 응답 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열왕기상 18:37-39)"
4. 선택적 무속
한편 위 선언문 중 김건희 씨와 비선 조직의 대선 개입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대책을 유권자 앞에 제시해야 한다는 요구는, 발상 자체가 부조리하고 현실적이지 않다.
예를 들자면, 허경영 후보는 박 정희 대통령 재임 동안 비선 실세로서 국정에 지대하고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자평하고, 실제적 경력으로 강조해 오고 있는 형편이다.
필자는 박 전 대통령도 어쩌면 이런류의 부친의 정치 스타일을 따라 하려다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곤 했다.
이와 관련하여 위 선언문에서 미가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을 선택적이고 변칙적으로 적용한 것 또한 매우 석연찮고 의아하다. 왜냐하면 이 구절엔 '복술'이나 '점쟁이'를 금하는 말씀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우상과 주상을 섬기는 것을 분명히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공히 동일하게 금지하는 말씀이 이어지기 때문이다(미가 5:12-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속 일반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복'과 '힘'을 지향하는 무속의 속성상, 그 타락과 오남용을 예의주시할 뿐이다"는 말은 '선택적 무속'이란 말 밖에 더 되는가?
광화문에서 구정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는 부적인 문배도를 공개하는 것에 대해선 한민족 문화 유산으로 간주하기에 침묵하는 것인가? 이 또한 공자처럼 선택적 귀신론을 수용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주역의 수리철학과 사주명리학, 음양오행 다 운세와 점을 낳고 무속의 영과 상통하므로 무속이니 법사나 도사니 불교니 유교니 도교니 외관만 다를 뿐, 다 연결된 계보인 것이다.
성경은 영적인 분별에 있어 '적당히'나 '회색지대'가 없다. '진리의 영' 과 '거짓의 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세상의 영'이 두 가지를 분별할 뿐이다(요한일서 4:1-6).
무릇 영적인 일들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천하의 공자도 이랬다 저랬다 할 수밖에 없었듯이, 명확하게 선이 그어지고 해명이 되는 일들이 아니다(고린도전서 2장).
어디 마음과 느낌이 드러나게 해명이 되는 일이던가? 비선 실세든 무속인이든, 얼마든지 뜻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사회가 아닌 정치 사회의 후보를 상대로 실체가 모호한 영적 이슈에 대해 명확한 해명을 요구하라고 언성을 높이는 행위 자체가, 경쟁하는 정당 측을 제외한 일반적인 견지에서 볼 때 몰이성적이고 궤도를 벗어난 상식 밖의 행동일 뿐 아니라 전도의 문을 막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지배하는 영을 다루는 신분이다. 그러므로 답이 없는 데를 향해 해명을 하라고 조르고 기다리는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적극 힘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제 본분을 다하는 일이다.
이 외에도 위 선언문의 내용에서 '법의 사사화', '멸문지화' 운운한 것은 김씨의 사적 녹취록을 빌미로 경쟁 당의 입장처럼 야당 후보의 인격 뿐 아니라 법의 정신과 권위를 무례하게 훼손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아울러 신천지에 대한 법적 조치 결정을 뜬금없이 기성 교회에 끼친 해악과 연관짓는 것도 맥락상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속인의 자문과 연계시키는 것 또한 녹취록적 억측일 뿐이다. 누가 들어도 이런 내용은 여당 정치인들이 하는 말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 선언문을 발표한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선언문 주체인 '우리는'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 명백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인들의 모호하고 자의적이고 왜곡된 신앙관 때문에 그간 한국 기독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세인의 조롱거리가 되는 일이 속출한 현실을 진지하고 무겁게 받아들여야할 시기이다.
선거를 앞둔 지금은 확실치 않은 추측성 이슈에 대해 특정 위정자를 집단적으로 성토하는 것이 옳은 자세가 아니라, 제반 상황을 통찰하고 기도를 집중해야 하는 때이다. 이것이 위 선언문 내용에서 주장하는 바 영적 싸움에 이기고 기독교의 미래를 위하는 길이다.
5. 무속을 넘어 한 마리의 양
"이명박 정권에서 서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왜곡된 종교관의 부정적 영향력과 박근혜 정권에서 주술적 무속에 물든 비선 정치로 인한 세월호의 비극을 경험하였다."
선언문의 위 내용은 당시 무속 신앙의 대가인 도올을 비롯해 주술적 무속에 물든 좌파들이 두 전 정권을 공격하는 단골 테마였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위 선언문은 촛불 혁명을 경험한 시민과 국민과 기독교인들이라 주장하지만 한국 사정을 파악하게 된 지금도 필자로선 과연 그런 과거의 촛불혁명적 행동이 얼마만큼의 정당성을 가진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의 영적 현실을 고려해볼때 위 선언문이 세월호의 비극을 특정 정치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이 영 납득이 안가기 때문이다.
종국에 선언문은 "비선과 무속 정치가 아니라 열린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상상하며 뭇 차이를 수용하는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교회가 앞장서야 할 것"이라며, 자못 낭만적인 투로 맺음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는 언제까지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열린 공간 속에서 열린 공감을 추구하느라고 취재윤리를 위반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못느끼는 언론과, 설상가상으로 그로 인한 피해자인 한 여성에게 선택적 무속의 잣대로 '음녀 프레임'을 씌우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몰지각성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실까?
대통령이든 대통령의 배우자든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는 주님이 아끼시는 한 마리의 양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김건희 씨가 과연 성경적 표현대로 산을 바다에 던지는 힘에 대해 말했다면, 그녀가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을 입게 될 때 믿음의 은사를 가진 주님의 딸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받을 만한 재목으로 하나님의 눈에 비춰질지, 그 누가 알겠는가?
필자는 김씨가 녹취록에서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높은 신(神)인 '하나님'에 관해 또렷한 발음으로 언급한 것을 들었다.
주님을 알기 전까지 영적인 사람들은 영적인 갈급함으로 인해 나름 자신들이 아는 신에 대해 열심히 파고드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눈엔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기독교인들보다, 김씨나 후보와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밟히실런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세상에 많은 그런 그와 그녀 모든 인생들에 대해 영적인 연민을 품고, 영혼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신분임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박현숙 목사. |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