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도 허술, 대속은 예수 아닌 가족들 몫 주장
좀비물과 왜곡 등 비합리적 서사로 부활 희화화
초자연적 신비와 초월, 무가치하게 취급 유물론
신앙 효과적 해체? 감독 자신 부족한 인간 이해

※본 리뷰에는 다소의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패러디: 원죄, 대속, 부활을 비틀기

<지옥>의 후반부 에피소드 세 편은 새진리회의 창시자 정진수(유아인 분)가 지옥행 형벌을 받고 죽은 이후의 사건들을 다룬다. 방송국 PD인 배영재(박정민 분)와 그 아내 송소현(원진아 분)의 갓난아이 튼튼이에게 지옥행이 고지된 일이 서사의 중심에 놓인다.

새진리회의 교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이 고지를 두고 온갖 사건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형벌 집행일이 다가온다. 그리고 형벌을 집행하는 지옥 사자들은 정해진 대로 아기를 죽이려 하다가, 아기를 보호하려 감싸안은 부부 두 사람을 대신 죽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드라마 초반부에 시연을 당해 죽은 박정자(김신록 분)가 타버린 해골 상태에서 원래 살아있는 몸으로 부활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지옥>의 첫 번째 시즌이 막을 내린다.

자세히 살펴보면 <지옥> 후반부 서사는 원죄, 대속(대신 죄를 짊어지고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구원과 관련된 세 핵심 개념을 기괴하게 비틀어 표현한다.
이러한 패러디의 의도는 명백하다. 이 세 개념이 결코 인간들에게 납득할만한 자기 이해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우선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아기에게 지옥행 고지가 주어지면서 그 부모에게는 절망스러운 고통이 주어지고, 새진리회와 세간에는 신의 뜻에 대한 회의감과 혼란이 일어난다.

이는 원죄에 대한 믿음이 인간들에게 결코 납득되기 어려운 것이라는 연상호 감독의 회의적 시각을 반영한다.

그리고 아기 튼튼이에게 형벌이 시행되는 날 아기가 아니라 두 부부가 대신 죽는 장면은 신의 심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진정한 대속은 예수가 아니라 현실에서 가족들과 정의로운 이들이 담당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드러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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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결말부 장면. 부모가 대신 희생하여 지옥행 고지를 받은 아기가 살아남았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타인을 해하거나 범법자로 산 것이 아닌 박정자의 뜬금없는 부활은 아기 튼튼이가 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신의 형벌에 별다른 기준이 없는 데다가, 그 형벌을 잘못 내린 배상 방식 또한 원칙이 없고 기괴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지옥>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개념과 요소들을 빌려와 기괴하게 비틀어 표현함으로써, 원래 기독교 신앙이 갖고 있는 믿음의 구조와 체계를 허물어뜨리려는 목적으로 활용한다.

이 회의감 넘치는 패러디 기법은 포스트모던 대중문화의 대표적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는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짜여진 '구조'가 인간의 삶을 이끌어 가는 우연성과 개별성을 억압하므로, 해체와 분쇄를 통해 삶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포스트 구조주의 사고에 기인한 것이다.

패러디는 기존 체계를 해체하는 것을 목표에 두면서 논리보다는 감성과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표현을 선호한다. <지옥>은 이런 포스트모던 예술의 특성들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작품이다.

서사에는 별 논리가 없고, 장면들은 기묘하고 흉측해 정감이 가지 않으며, 작품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음산하고 몽환적이다.

이와 같은 작품에 인용되는 기존의 가치나 가르침들은 그 이미지가 급격하게 나빠질 수밖에 없다. <지옥>은 이렇게 나쁜 이미지를 덧입힐 주된 타겟으로 기독교의 원죄, 대속, 부활 신앙을 설정하고 있다.

◈기독교의 패러디: 원죄, 대속, 부활을 비틀기

그 가운데서도 부활에 대한 패러디는 연상호 감독판 반종교 정서의 최일선에 놓여 있다.

그를 대한민국 상업 영화계의 유력한 흥행감독으로 만들어 준 작품이 바로 좀비 영화인 <부산행>이다. 좀비물은 기독교의 부활 신앙을 왜곡된 방향으로 패러디하는 대표적인 영화, 드라마 장르이다.

원래 좀비는 서인도제도, 특히 아이티에서 발흥한 부두교 술법의 산물로서, 죽은 시체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가사 상태에 빠지는 저주에 걸린 것을 말한다.

부두교 신자들은 이 술법에 걸린 사람이 백치가 되어 주술사의 뜻대로 조종을 당하게 된다고 믿었다.

미국의 B급 호러영화 감독들은 이 부두교 전설을 기독교의 부활 신앙과 합쳐 좀비를 시체가 살아난 것으로 재정의했다. 오늘날 좀비 장르는 그렇게 탄생했고, 연상호 감독은 이 좀비 장르를 한국 영화계에 들여와 최초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그가 좀비 장르에 눈을 돌린 것은 독립영화 감독이었던 시절 그의 반종교적 작품 성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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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감독의 좀비 영화 <부산행>.

근래의 좀비 영화나 드라마에서 좀비는 삶과 죽음, 생체와 시체, 인간성과 동물적 본능이 반씩 뒤섞인 끔직한 혼종으로 묘사된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생명의 부활은 크나큰 행복이지만, 오늘날 대중문화가 가르치는 부활은 죽어야 할 인간이 죽지 못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부자연스러움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

이는 인간의 삶이 오직 현실의 신체적 삶 단 한 번밖에 없으며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허황된 욕망이라는 실존철학적 인간 이해를 반영한다.

<지옥>은 좀비 장르의 작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활을 묘사한다. 그렇지만 그 의도는 좀비 작품들과 다르지 않다.

<지옥>의 마지막 장면은 부활이라는 것이 허황된 바람이며, 또한 이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 치더라도 인간의 자연적 운명을 역행하는 것이기에 행복과는 거리가 먼 저주에 가까울 것이라는 연상호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결국 <지옥>이 말하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비롯한 모든 내세 종교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현실의 삶을 그 본연의 가치대로 살지 못하게 방해한다는 것이며, 그러하기에 종교들이 초자연 영역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허구적 교설이나 실증적 근거가 없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은 지옥 형벌을 고지하는 천사와 이를 집행하는 집행자 등 초자연적 존재자들을 이야기의 출발점 삼아 서사를 전개하지만, 실상 신비와 초월의 영역을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하는 유물론적 사고에 충실한 작품이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부활을 비롯한 모든 초자연적 요소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종교적 믿음을 분쇄하기 위해 차용되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나 요소들이 전혀 공포스럽지 않고 그저 우스꽝스러우면서 혐오스럽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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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마지막 장면, 지옥 형벌을 받아 죽었던 사람의 부활 장면을 기괴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삶에서 신비와 초월의 영역을 완전하게 배제하려는 <지옥>의 반종교적 메시지는, 인간 이해의 핵심 요소를 놓친 협소한 견해에 불과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특별한 종교적 체험이 없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나름의 신비와 초월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아직 이루지 못한 존재적 가능성에 대한 자각일 수도 있고, 우주 만물을 포괄하는 존재의 무궁한 크기와 깊이에 대한 경탄의 감정일 수도 있다.

혹은 인간 개개인이 자기 삶의 행실과 마음 속 생각을 되짚어 보면서 느끼게 되는 형언하기 어려운 죄책감과 그로부터 불가해하게 시작되는 도덕적 삶에 대한 염원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의 영혼 심층부에 새겨져 있는 본성으로서, 기독교 신앙은 이를 영혼이 받아들이는 영감의 발현 증거라고 본다.

그 외 각각의 종교들도 나름의 방식대로 영감 혹은 영성 개념을 통해 이런 부정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초월적 측면을 이해하려 한다.

이는 인간이 도무지 파헤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 하나님과 연결된 불가해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자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자각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지극히 실제적이면서 중요한 인간본성 가운데 하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지옥>은 이렇게 중요한 부분이 결핍된 인간 이해를 변증하려는 의도로 기독교 신앙의 주요 개념들을 왜곡하고 희화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앞뒤가 맞지 않는 비합리적 서사를 내세우고 있다.

이는 일견하기에 기독교 신앙을 효과적으로 해체하는 기법 같지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감독 자신의 부족한 인간 이해를 어떻게든 변증해보기 위해 비합리적 감성과 감정을 자극하는 데 주력하는 무리수에 지나지 않는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