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당시 극도로 부패하여 면죄부까지 팔았던 교황청은 일반 교인들이 읽지 못하는 라틴어 성경 밖에 출판하지 않았으며 설교도 오직 라틴어로만 행하도록 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독일어와 프랑스어 영어 등으로 번역된 성경을 교인들이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의 명령에 따르는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칭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 암흑의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는 로마서 2:17의 말씀을 근거로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청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 6: 22 칭의 -성화 - 영화의 구원의 과정을 간과하였습니다. 또한 롬 12장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야 만이 천국에 간다는 산상수훈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음을 외면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친언인 마 7:21" 나 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는 말씀을 무시하였습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성경의 통전적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함으로써 자신이 듣고 싶은 말씀만 받아드리는 편파적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갈라디아 등에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의 행위는 율법의 행위 곧 바리세인들이 성령의 도움 없이 인간의 욕심으로 행하는 육신적 행위를 가르침에 유의해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자신의 욕심을 따른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믿는 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믿음의 행위는 구원의 과정인 성화를 이루어 가는데 필수 적인 것입니다.
루터는 당시의 개신교인들이 믿기만 하면 천국 가는데 도덕과 윤리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라는 반문에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을 했음을 후회했습니다.
루터는 이단이 아님을 기사와 이적을 행함으로 증명하라는 교황청의 도전에 흔쾌히 응하지 못하고 성경의 권위와 자신의 양심이 증명한다고 변명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성령의 활동은 사도시대 이후로 끊어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불행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Eddie L. Hyatt, 2000 years of Charismatic Christianity p 76)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 7-8) 는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주류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근 400여 년 동안 성령을 무시하고 성령이 숨막히게 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이 소멸되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다른 한 축인 칼빈은 이중 예정론과 성도견인론을 주장함으로써 한번 구원 영 원구원론을 배태하여 개신교인들로 하여금 믿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반드시 천국에 간다는 잘 못된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출간 후, 근 100년 동안 개신교인들의 삶이 불신자들의 그것보다 더욱 정욕과 죄악으로 가득 찬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였습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빌립보서 2장 12절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는 말씀을 간과하고,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만을 근거로, 성화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일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BOOK II Ch 3, 12 p. 262).
자신의 생각을 진리로 주장하기 위하여 야고보서를 지프라기 서신이라고 도외시 했던 루터와 다름 없이 칼빈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하여 성경말씀을 편파적으로 인용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이 성경을 교황청과의 싸움에 무기로 사용하는 데에 급급하여 성경을 편파적으로 묵상함으로써 칭의-성화-영화의 온전한 구원교리를 무시하고 오직 믿음, 이중예정론, 성도견인론을 주장한 과실과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홀시한 작태는 종교개혁의 공로를 칭찬만 할 수 없게 합니다.
퓨리턴의 원조인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주도한 웨스터민스터 신조가 공포될 때까지 근 100동안 개신교 신자들의 타락한 삶을 살게 하는 주된 요인을 제공한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은 온전한 종교 개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조의 구원교리를 반영한 예수교장로교회의 헌법은 신조 제9항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믿고 의지하여 본받으며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을 복종하여 겸손하고 거룩하게 행하라 하셨으니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 신자들의 입맛에 맞추어 설교하는 목사님들은 더 이상 없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