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수라는 이름이다. 예수는 역사와 문화와 인종을 초월해서 전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언어이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예수가 인생의 목표가 되고 있다.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으로 인해서 인생에 소망을 안고 영원한 삶을 기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서 죽음과 같은 고난에도 생명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Max Lucado 목사의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위해 하신 일입니까?" 하는 도전적인 질문을 접하게 된다. 주님이 십자가를 선택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우리 인생에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를 분명히 기억하게 된다는 말이다. 사도행전 4:12에 나오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하는 말씀은 그 이름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예수는 죄와 멸망에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확실한 선택이 되고 있는데 수많은 선택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선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의 의미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영적인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만 표면적으로 볼 수 있는 생명은 육신적인 생명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육신적인 생명이 있다 해서 영적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육신은 멀쩡하게 살아있지만 영으로는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삶은 길지 않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신비한 방법을 통해서 생명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수는 인생에 진리가 되시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를 삶에 받아드리는 사람에게는 그분의 생명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분의 존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영원히 사는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거하는 곳에 생명이 있고 그분의 피가 흐르는 곳마다 죽음 가운데 살려내는 능력이 나타날 수 있었다. 인류 역사를 보더라도 예수라는 이름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자유할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들의 영적으로 죽어있던 영혼이 죽음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24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었노라고 선포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얻었다' 하는 말은 헬라어로 '붙잡다, 소유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얻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얻었다는 말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에 구구절절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말씀을 중심에 받아드리는 사람마다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하는데 이는 바로 영적인 생명을 이룬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에 바울도 로마서 8:1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고백할 수 있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심판이 있지 않고 완전한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에 깃들어있는 메시지는 영생과 더불어 성령의 내주하시는 복을 의미한다. 성령이 내주하신다 함은 우리의 영혼에 그분이 머물러 계신다는 말로서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거하심을 기념하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 있는가를 보면 그분의 임재를 알 수 있는데 성령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영으로서 믿는 사람들의 삶에 깊은 관계를 이루고 계신다. 하나님이아무리말씀을 주셔도 성령이 이를 증거 해주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깨달아 아는 모든 일들이 오직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말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령이 강을 이루도록 줄기차게 임하는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는 곧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생수의 강과 같이 넘치도록 부어 주시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얘기하는 생수는 사람을 살리는 물로서 잠시잠깐이 아니라 영원히 살리는 물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생수를 주실뿐만 아니라 생수의 근원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신 광야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게 되자 모세를 원망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출애굽기 17:6은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여기에서 모세가 한 일은 자신의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이신 예수를 치는 것이었는데 고린도전서 10:4에서는 이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 길을 갈 때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것처럼 성령을 받지 않고는 온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물이 육체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처럼 여기에서 말하는 생수는 영적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이다. 예수님이 일찍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셨건만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생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세상이 즐기는 돈이나 명예나 인기 같은 것에 관심을 갖는 가운데 이것들을 얻는 일에 목말라할 따름이다. 명예에 한번 취하면 마약에 취한 것처럼 명예를 얻는 일에 목을 매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 꼭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를 떠올리게 되는데 당시 부자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 지옥으로 이름 붙여진 음부에 있으면서 영적으로 심한 갈증을 느끼지만 이미 때가 지난 뒤였다. 이에 그는 집에 있는 다섯 형제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서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성령은 우리 인생을 도우시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하신다. 인생에 예수를 구주로 받아드리도록 하시는 분도 성령으로서 요한복음 14:26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은 더 나아가 우리가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분으로서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말씀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 시간 성령의 갈증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유황불이 훨훨 타는 지옥에서 목말라하고 고통 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던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몰래 찾아왔던 사실을 생각해보라. 사마리아 여인처럼 죄에 눌려 지내던 사람도 예수님이 허락하시는 생수를 마실 수 있었다. 38년 동안 중풍병을 앓아서 소망도 가망도 없었던 병자가 주님의 생수를 마심으로서 병에서 고침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성령을 부어주시는 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성경은 성령을 가리켜서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성령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말이다.
오직 예수 안에만 있는 구원
이 땅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으며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음을 본다. 심지어 자신이 교주라고 하면서 자신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거짓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곳에만 구원이 있는 것처럼 미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알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에 쉽게 미혹당하고 있다. 세상에 길이 많이 있다고 해서 아무 길에나 들어설 수는 없는 일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다른 종교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에의 길은 오직 하나인데 인생을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에게만 있기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직도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러한 말씀을 전하고 싶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몸부림했을 그분의 아픔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라. 십자가의 나뭇결을 손가락으로 매만져 보고 못 끝으로 당신의 손목을 지그시 누르면서 그분이 느꼈을 고통을 체험해보라. 군병들이 뱉은 침이 얼굴에 튀고 뾰족한 가시 끝이 머리를 찌르며 대못이 손목을 뚫어내고 머리 위에 죄 패를 붙이면서 조롱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주님의 온화한 얼굴을 찢어 놓은 고통의 면류관, 살과 나무를 뚫고 주님을 매달아 놓은 세 개의 못, 쓰디쓴 해융과 살을 찢는 창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님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지셨던 일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질문에 대해 변명하지 말고 진정성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부흥 전도자 무디 목사는 수십만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고 특히 주일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운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루는 전도할 대상을 찾는 가운데 어떤 술주정꾼을 만나 예수님을 아느냐 하면서 다짜고짜 물었다. 그가 예수라는 말을 듣자마자 화를 내면서 폭행을 가하는 바람에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지 3개월이 지난 후 술주정꾼이 찾아와서 목사님에게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예수님을 아느냐고 물었던 말이 자신의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는 말이다. 복음의 씨앗은 무디가 뿌렸지만 씨가 자랄 텃밭의 심령은 성령님이 붙들고 계셨던 것이다. 형체도 모르는 예수라는 씨가 깡마른 텃밭에 뿌려져 뿌리를 내림으로서 계속 자라고 있었던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에 시편 기자는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전하는 일이 어렵고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인생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있어서 자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마다 오늘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을 똑바로 기억하고 가슴에 새길 수 있었으면 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제부터는 이 말씀을 심령 깊은 곳에 새기고 우리 인생에 오직 예수라는 이름만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예수 외에는 우리에게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이 적당히 지어낸 말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생명과 같은 말씀이다.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온 세상 위하여 나 복음 전하리 만 백성 모두 나와서 주 말씀 들어라 죄 중에 빠져서 헤매는 자들아 주님의 음성 곧 듣고 너 구원 받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