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대입 원서를 접수하는 때다. 해마다 이맘 때면 졸업생 아이들의 얼굴을 보게 된다. 다시 대학에 지망하는 아이들은 모교에 와서 원서를 쓰고 접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않던 영희가 갑자기 나타났다. 영희는 올 초에 전주대학교 경배와 찬양과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서 진학을 못했던,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함께 성경공부 하던 기독학생이다. 졸업 후 요리전문학원에 다니며 요리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소식은 전해듣고 있었다. 완전한 숙녀티가 나는 영희를 만나는 순간 고교 시절 이 아이의 가정이 생각 나 눈물부터 핑 돌았다.
“영희야, 정말 오랜만이로구나. 오늘 원서 쓰러 온거니? 잘 지냈고?”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원서 쓰러 온게 아니고 그냥 선생님 뵙고 싶어서 온거예요.”
밝고 환한 웃음으로 영희는 말했다. 나는 영희를 기록보존실로 데리고 가, 자리를 잡은 후 오랜만에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결국 이혼했어요

“영희야, 요리 자격증 땄다면서?”
“네, 선생님. 한식이구요. 며칠 후에 일식 시험이 있어요. 기도해 주세요.”
“그럼, 당연하지. 참, 집안은 좀 어떠니? 아빠하고 엄마는….”
영희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지는 듯 싶더니 다시 명랑한 소리로 대답했다.
“결국 이혼하셨어요. 아빠가 나가셨구요. 저는 엄마하고 살아요.”
“그렇구나. 그럼 아빠는 그 때 만났던 분하고….”
“네, 선생님.”
영희가 고3을 올라올 무렵부터 가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계시던 영희 아빠는 다단계업을 하시던 한 아주머니를 만나면서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고, 가정도 책임지지 않으셨다. 영희의 어머니께서 한 중학교 급식실에서 일을 해주시고, 그곳에서 남은 음식을 가져다 영희와 그 오빠를 먹도록 하며 어렵게 생활해 온다던 이야기를 들었었다. 영희는 고3을 마칠 무렵까지 아빠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무척 힘겹게 생활하고 기도도 많이 했었다.
“그랬구나. 엄마가 많이 힘드시겠다.”
“그래서 제가 얼른 자격증 따서 엄마 도와드리려구요.”
“그래, 영희야. 선생님이 한 가지 말하겠는데, 네 아빠가 그렇게 하셨어도 네 마음 가운데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으면 좋겠다. 영희는 기도하는 사람이니까 잘 생각해보면 알거야. 사실 아빠가 얼마나 불쌍한 분이니? 믿음생활 잘 하시다가 아내와 자녀를 버린 그 죄를 나중에 어떻게 씻김을 받으실지 말야. 영희야, 그러니까 더 기도하렴. 엄마도 힘드시겠지만 그 긍휼한 마음을 품고 기도하시면 좋을 것 같아.”
“선생님. 저 알고 있어요. 힘들긴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많이 성숙한 영희의 모습에서 나는 평안함을 맛보고 있었다.


헌금이예요

영희는 지갑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어 내 앞에 내놓았다.
“영희야, 이게 뭐니?”
“선생님. 낮에는 학원 다니구요,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기독교반 후배들 축제 공연이 며칠 안 남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아이들 위해서 써주세요. 제가 번 돈의 십일조 정도예요.”
이렇게 귀한 돈을….
마음속에 진한 감동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어렵고 힘들게 사는 아이인데 이렇게까지 소중한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니, 영희야. 십일조면 하나님께 드려야지, 이렇게 해도 괜찮겠니?”
“그럼요, 선생님. 기독교반 후배들이 하나님 높이기 위해서 축제 때 참여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예요. 그리고 저도 학생 때 도움 많이 받았잖아요. 사실 얼마 안 되요.”
“그래, 영희야. 네 마음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거야. 선생님이 참 기쁘고 고맙구나. 네가 아주 잘 크고 있으니 말야. 선생님이 기도 한 번 할게.”


마음을 받으소서

영희와 나는 손을 맞잡았다.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이 일었다. 힘겹고 어려운 때일수록 이렇게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하며 살아나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특히 그 주인공이 내 제자일 때에는 감동이 더하다. 영희의 얼굴도, 말하는 것도, 생각도 모두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어 더욱 기뻤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영희를 잘 지켜주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며 살 수 있도록 은혜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귀한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후배들을 위해 내놓습니다. 주님께서 칠 배로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 또 자격증 시험도 있사오니 주님, 인도하소서. 축복하소서. 헤어져 있는 아빠와 엄마도 회복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더욱 아빠, 엄마를 위해 기도하는 영희로 축복하시길 원합니다.……”
기도는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기도하는 나도 영희도 이미 울고 있었다. 여러 가지 힘들었던 영희의 순간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강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며칠 후, 아침 이른 시간 영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지금 시험 보러 가요. 기도 해주세요.”
이럴 때는 즉각적인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를 미루면 나중에 하기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 영희야. 전화기 귀에 가까이 대렴. 지금 기도할게.”
“네, 선생님. 시작해도 좋아요.”
나는 전화기를 통해 영희의 앞길을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하였다. 영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길거리 적당한 곳에서 함께 기도하고.
“선생님.고맙습니다. 시험 잘 볼 수 있을 거예요. 연락드릴게요.”
영희의 생글생글한 얼굴과 함께 밝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계속 남아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지배하고 있었다.


최관하 교사(영훈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