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전승절에 나타난 역사적 왜곡
7월 27일은 6·25전쟁의 정전협정일이다. 북한은 이날을 전승절(조국 해방 전쟁 승리의 날)로 기념한다. 7월 28일 자 북한 노동신문은 7·27 전승절 관련 기사로 온통 도배했다.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올해는 유독 이날을 성대히 기념하고 있다. 노동신문은 '제7차 전국로병대회' 개최 소식을 시작으로 김정은의 축하연설과 평양과 각 지역의 축하 행사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평양에서는 평양대극장, 피바다가극단, 국립연극단, 국립민족예술단, 국립교예단 예술인들이 총집결해 경축 공연을 진행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이날은 6·25 노병 세대가 발휘한 혁명 보위 정신을 본받아 조국 통일의 승리를 향한 투쟁을 재다짐하는 시간이다. 김정은의 기념 연설의 핵심도 이것이다.
김정은은 연설에서 6·25 노병들을 '영웅적 투쟁 정신을 창조한 1950년대의 조국 방위자, 조국 건설자들'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면서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UN 참전군을 '미제를 괴수로 하는 추종 국가 무력침범자들'이라고 언급했다. 반대로 6.25 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은 '제국주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피 흘린 중국 인민지원군'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6.25 참전에 대해 '침략에 맞선 정의'라고 주장하며 참전 노병들에게 훈장을 수여한 시진핑(習近平) 행보에 대한 맞장구이자 화답으로 보인다. 6·25에 대해 심대한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두 나라이다. 이에 6·25전쟁 원인 및 남침 직전까지의 전개 상황을 자세히 기술해 6·25의 책임(전범)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남조선혁명론', 김일성의 남침 의지
북한 김일성의 남침야욕은 1950년 6·25가 터지기 훨씬 이전부터 볼 수 있다. 1947년 2월 17일, '북조선인민회의' 승인을 통해 행정부 역할을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세워졌다. 북한지역에서 공식적으로 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김일성을 수반으로 선출했고, 이때부터 김일성은 '남조선혁명론'을 강력히 주장했다. 1947년 후반기부터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법률 전문가들에 의해 작성된 북한 헌법 초안은 스탈린의 수락이 떨어진 후, 1948년 4월 29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승인을 거쳐 9월 8일에 '인민민주주의헌법'(제헌헌법)으로 제정되었다. 북한 헌법 제103조는 인민공화국의 수도를 서울로 설정해 놓고 있는데,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스탈린(Joseph Stalin)과 김일성의 야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1949년 3월 3일,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군사적 공격(남침)을 언급했고,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들어 반대했다. 당시만 해도 소련의 대외정책 제1순위는 유럽이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38선의 긴장 국면을 이용해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현대식 무기를 획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훈련된 부대를 확보했다. 그리고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자 다시 소련에 남침 의지를 보였다. 이때도 스탈린은 김일성이 군사행동을 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심경 변화와 그 이유
▲스탈린과 김일성 ⓒKBS 1 방송 캡처 |
모스크바의 반대에 부딪힌 이후에도 김일성은 결코 남침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중국의 모택동을 만나 이를 추진하고자 했다. 모택동은 이 문제를 스탈린에게 떠넘겼다. 당시, 모택동도 한반도 문제에 대해 스탈린과 같은 입장이었다.
김일성은 의지를 꺾지 않고 다시 1949년 8월, 군사적 수단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강했던 스탈린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이 슈티코프(Terentii F. Stykov) 소련대사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이것이 김일성의 군사계획에 스탈린이 최초로 동의를 표시한 전보이다. 스탈린은 다시 2월 2일에 슈티코프에게 전보를 보내 "이 문제는 반드시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이 사실을 적뿐만 아니라 조선의 기타 지도자와 중국 동지들에게도 비밀로 해야 한다"라고 지령을 내렸다.
1950년 2월 15일, 모택동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의견을 물었고 모택동은 "우리는 당연히 김일성을 도와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모택동은 이미 그전(1949년 5월)에 김일성에게 제4 야전군 소속의 잔여 조선인 병사들을 파견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내에 조선인 병사는 약 1만 6천여 명이 있었다.
모택동은 1950년 1월 1일, "전쟁이 종료되어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조선인부대가 점차 할 일이 없어지고 있으므로 만일, 조선 정부가 원한다면 그들을 보내줄 수 있다"라고 다시금 그 약속을 김일성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김일성은 환영의 뜻을 표했다. 모택동은 3월 20일,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인 병사 중, 14,000명을 집결시켜 독립 15사단으로 개편해 북한으로 파병했으며 부대는 3월 말에 원산에 도착했다. 이 부대는 전쟁 시에 인민군 제12사단이 되었다.
김일성은 1950년 4월 10일, 박헌영과 같이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이때 박헌영은 "남한에 있는 20만 명의 공산당원들이 북측의 첫 신호에 맞춰 봉기할 준비를 이미 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남한지역에서 유격대 활동이 가장 활발했을 때는 1949년 가을이었다. 1950년 봄부터는 유격대 활동이 많이 진압된 상태였다. 미군의 전쟁 참전 여부에 관련해서 김일성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미국이 참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첫째, 기습적인 공격으로 3일 이내 승리를 확보할 수 있다. 둘째, 20만 명의 조선공산당원의 봉기가 있을 것이다. 셋째, 남한 각 도의 유격대가 조선인민군을 지원할 것이다. 넷째, 미국은 참전을 준비할 시간이 없다.
스탈린도 트루먼 대통령의 1월 5일 성명과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1월 12일 연설(애치슨 라인)에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불간섭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스탈린이 태도를 바꾸어 1950년 1월 30일에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처음으로 인정해 준 것을 볼 때 분명히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애치슨 라인' 설정은 친 중국(공) 정책으로 중국(공)을 미국 편에 서게 하여 소련을 고립시키고자 한 미국의 전략이었다.
스탈린의 최종 승인과 김일성의 남침
1950년 4월 10일, 스탈린은 김일성의 군사적 공격을 최종 승인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았다. "만일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면 나는 조금도 도울 수 없으므로, 조선은 반드시 모택동에게 모든 도움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라고 입장표명을 했다.
김일성이 모스크바에 돌아오자마자 소련의 무기가 대량으로 청진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그 무기들을 38선 부근에 배치된 각 부대에 보급했다. 5월부터는 조선 주재 소련군 간부들의 전면적인 교체가 이루어졌다. 이전의 군사 고문들이 다수의 작전 전문가들로 교체되었다.
김일성은 5월 13일에 베이징에 가서 모택동을 만나 스탈린의 동의를 이미 얻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직접 이러한 사실을 확인했고, 스탈린은 재차 이 문제를 중국과 조선 동지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은 소련은 미국과의 38선 협정이 있지만, 중국은 자유로우므로 북한에 군사원조를 제공하기가 수월하다고 설명했다. 김일성은 6월 말에 공격을 개시하기를 원했고, 모스크바는 그 방안에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김일성은 군 지휘관들에게 6월에 전쟁을 개시한다고 통보했다. 김일성은 6월 8일, 인민군 작전부대를 집결시켰다. 북한의 모든 철도는 비상근무에 돌입했으며 일반인들의 철도 이용이 금지되었다. 이때부터 남쪽으로 향하는 모든 열차에는 병사와 대포, 군용 장비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소련군 총참모부 역시 북한의 대남공격 작전계획을 확정했고, 남한을 향한 군사행동 개시 명령을 하달했다. 만반의 전쟁 준비가 완료된 가운데 김일성은 6월 25일 새벽 4시 남침을 감행했다. 이렇게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암약하고 있는 지하혁명조직
6·25 전쟁 전범 국가들은 소련, 북한, 중국이다. 6·25 남침은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획책하기 위함이었다. 김정은도 이 야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7·27 전승절에 북한이 가장 내세우는 구호가 바로 '조국 통일의 승리'이다. 미국을 '침략자'로, 남한을 '미제괴수 꼭두각시'로 몰아붙이는 이유도 바로 '조국 해방 전쟁'을 제1의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이 다시 뭉치고 있다. 한국은 어느 편에 서 있어야 하는가.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자명한 일 아닌가.
속이 터지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7월 27일에 남북 간 통신연락선 복원에 합의한 일이다. 왜 하필 북한이 전승절로 지키는 이날인가. 며칠 전에 간첩혐의로 여러 명이 체포된 사실이 있다. 그들은 북한의 지령에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비단 이들뿐이겠는가? 과거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을 감행케 한 이유 중 하나가 남한 내 20만 명의 지하 공산조직의 존재였다. 현재 우리 사회 안에 김정은을 추앙하는 지하혁명조직이 암약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리 없는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이글은 WORLDVIEW 9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