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의 환상적 세계관 확장은 왜 허망한가
현실 비판이나 인간 반성, 배제나 약화해서
비현실적 설정 기반으로 서사 꾸리는 약점
<엔드게임> 이후 모든 마블 영화에 나타나
◈서사 예술과 환상: 환상에 기초한 서사 예술의 부각
모든 서사 예술은 환상에 기초한다. 소설이나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하고 관찰한 사실들에 대한 기억을 마음 속에서 이리저리 뒤섞고 조작해서, 현실과 유사하지만 실상 현실이 아닌 독특한 허구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중세 초 신학자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어린 시절 <디도와 에네아스>를 비롯한 그리스 신화의 재미에 탐닉한 적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그렇게 현실과 괴리된 허황된 것에 몰두한 데 대해 크게 후회한다고 기록한 바 있다.
참된 신앙은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엄정하게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데 신화에 탐닉하면 현실 인식이 무뎌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신화와 문학에 대한 어거스틴의 비판적 인식은 중세 내내 서유럽 전역의 신앙인들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중세 말엽인 13-14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에서는 소설책은 커녕 이야기책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활판 인쇄술이 없어서 책을 만들려면 전부 손으로 필사를 해야 했는데 책을 필사할 줄 아는 고급 인력들은 성경이나 신학 문헌, 혹은 행정과 법에 관련된 문서들을 필사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 당시의 문학이라 하면 음유시인이나 유랑극단이 노래하던 낭만적 기사문학, 그리고 이교적 풍습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한 민중들 사이에 구술로 전해지던 민담이나 전래동화 같은 것들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 신앙인이나 지식인들은 이런 서사 예술을 저속하고 통속적이라 여겨 멀리하곤 했다.
유럽에서 서사 예술이 문화의 주류로 올라선 것은 14-16세기 발발한 르네상스 덕분이다. 중세 말 크게 성장한 교육도시 및 상업도시를 중심으로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예술적 유희를 죄악시하던 정서가 많이 희석된 데다, 왕족이나 대귀족들이 자신들의 교양 수준을 뽐내는 방편으로 문화예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유럽 각지에서 문학의 거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다. 피렌체의 단테, 잉글랜드의 초서와 셰익스피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등 오늘날 서구 근대문학의 시조로 인정받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해 걸출한 작품들을 남겼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는 소설과 희곡 같은 서사 예술에 대한 지식과 안목을 갖추는 것이 교양 있는 지식인의 제일요소로 여겨져 왔다. 노벨상에 문학 부문이 있는 것도 이런 오래된 인식 덕분이다.
오늘날 서사 예술의 영향력은 이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극단적으로 증대된 상황이다. 자본, 창의성, 그리고 미디어 기술이 결합된 서사 예술의 힘은 대중문화 전반을 좌우하는 동력이 된지 오래다.
그런데 최근의 서사 예술은 갈수록 더 서브컬쳐 성향으로 편중되는 모습을 보인다.
서사 전개 속도가 매우 빠르고 액션이나 CG 장면이 무척 현란해서 관객에게 서사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고, 온갖 비현실적인 설정이나 요소들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서브컬쳐형 서사들이 대중문화계 원천 콘텐츠로 각광을 받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어벤져스> 시리즈는 서사 예술의 서브컬처화를 주도해 왔다. |
◈서사 예술과 현실: 마블식 환상에 지쳐버린 대중
이렇게 서사 예술 전반이 다분히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제공하는 흥미를 찾는 데 몰두하고 있는 현 상황은 문화적으로 볼 때 일종의 후퇴나 다름이 없다.
비현실적 재미를 주로 선사하는 영화, 드라마들은 전통적으로 서사 예술이 가지고 있던 현실 비판이나 인간 자신에 대한 반성이라는 기능을 배제하거나 고의적으로 약화시킨다.
이런 조류를 주도하는 것이 미국 대중문화계를 자본으로 장악한 디즈니의 작품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마블이라는 IP(지적재산권)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제작되고 있는 슈퍼히어로 영화들이다.
평론가들이 슈퍼히어로 영화를 비평할 때, 그 서사 자체로부터 어떤 인문학적 메시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는 이 영화들이 정말 충분히 주목할 만한 인문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 아니라 평론가의 평론 자체를 유식하게 보이려 하기 위함인 경우가 대다수다.
영화 속에 지극히 부분적으로 반영된 인문학적, 철학적 고찰을 쥐어짜내듯 찾아내서 부풀려 논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실상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그 본연의 비현실적 흥미 유발 요소들을 충실히 부각시킬 때, 비로소 감성적 향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나온다.
그렇지 않고 어설프게 현실적인 설정들을 반영하는 경우 그 매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이번 마블 영화 <블랙 위도우>는 이러한 어설픔이 짙게 묻어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슈퍼히어로 설정과 첩보 서사의 결합을 통해 인간을 도구화하는 부도덕한 행태에 대한 비판의식을 표현하려 하지만, 양측의 비중이 애매하게 혼합된 까닭에 비현실적 설정과 현실적 서사가 따로 노는 느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영화의 서사에 몰입이 어렵고 캐릭터의 감정에 공감하기 힘들다.
어설픈 완성도를 지닌 작품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도구처럼 활용되고 버려지는 요원들의 비애를 담은 첩보 서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제이슨 본> 시리즈나 <레드 스패로> 같은 작품에 비해 한참 모자라다는 느낌이다.
▲<레드 스패로>의 주인공 도미니카 에고로바(제니퍼 로렌스 역). 인간을 비정하게 도구화하는 첩보 서사 측면에서 <블랙 위도우>는 <제이슨 본> 시리즈나 <레드 스패로>에 비해 몰입감이 한참 떨어지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
만일 슈퍼히어로 영화가 현실 비판이나 인간성 반성 등처럼 깊이 있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싶다면, 아예 히어로 영화 특유의 흥미유발 요소들을 최소한도로 억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이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2019)이다.
<조커>는 원작 슈퍼히어로 코믹스에서 현실적 드라마 요소만 가져오고, 비현실적 설정과 장치들은 모두 배제해 버림으로써 영화가 목표로 하던 인문학적 메시지 전달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블랙 위도우>는 슈퍼히어로 서사의 최대 약점, 즉 현실적 세계인식을 담아내기 어려운 비현실적 설정들을 기반으로 서사 전반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런 약점은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모든 마블 영화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점이라 볼 수 있다.
현재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고대 다신교 신화 체계처럼 과도하게 부풀려진 세계관과 서사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방만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지적했던 신화의 정체는, 종국적으로 환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 환상들의 집합체였다.
이러한 환멸은 우선 인간과 세계의 불완전한 현실을 직시할 때 일어나고, 다음으로는 성경을 통해 이러한 현실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보다 내밀한 실상, 즉 영적 진리를 깨달을 때 한 차례 더 강하게 일어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 4 라인업을 보면 마블 서사가 점차 더 통제하기 어렵게 방만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블 측은 기존 설정과 캐릭터에 식상해진 관객들에게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특히 수익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중국 관객들을 의식해서 샹치(중국인 슈퍼히어로)나 이터널스(<이터널스>는 중국 감독 클로이 자오가 연출을 맡음) 등 새로운 캐릭터들을 대거 발탁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 4에 라인업되어 있는 <이터널스>. |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같은 주제의 서사들을 어떻게든 수익으로 연결시켜 보겠다는 몸부림일 터인데, 과연 의도된 만큼의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이다. 대중이 슈퍼히어로 서사에 상당한 피로감을 나타낼 만한 시기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마 마블, DC 같은 코믹스 IP들은 향후 슈퍼히어로 서사에 익숙치 않은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기까지, 상당한 기간 조정기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고, 또 나쁘지 않은 전망이다. 비현실과 환상에만 몰입하는 영화들의 인기가 한풀 꺾이고, 인간과 세계와 신앙과 문화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들이 풍성해질 시기가 다시 찾아올 것이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