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센티미터의 작은 키를 가진 김진숙 목사님은 누구보다 강인한 여성이었으며 신실한 그리스도의 군사이자,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최고의 삶을 살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남겨진 믿음과 사랑의 유산을 가지고 지역 사회와 사람들을 세워갈 것입니다."
미주 노숙자 사역의 대모라 불리며 일평생을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해 온 고(故) 김진숙 목사 추모예배가 지난 17일, 메이플우드 장로교회에서 거행됐다.
이날 예배에 자리한 200여 명의 참석자들은 생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죽어서도 자신의 시신을 워싱턴대학교(UW) 의과대학에 의술 연구용으로 기증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던 고인의 아름다웠던 삶을 기렸다.
추모예배는 생전 고인의 바람대로 장송곡 대신 감사와 찬양이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 옷 만 고집했던 그녀의 보랏빛 물결과 함께 울려 퍼졌다.
추모예배는 특별찬양, 추모와 감사, 메이플우드 장로교회 그레이더 목사의 설교, 에이미 디라니 목사의 축도로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고 김 목사님은 홈리스들과 지역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헌신했었다"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위대한 목회자였다. 또한 모든 홈리스들을 사랑으로 돌본 어머니였다"고 기억했다.
한편 지난 3일 새벽, 노환으로 병원에서 향년 85세로 별세한 김진숙 목사는 1970년 미국으로 건너와 반 세기 동안 노숙자들과 함께 살아왔다.
1935년 음력 7월 26일에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태어난 김진숙 목사는 어린 나이였지만 나라를 빼앗기고 억압 당하는 민족의 아픔을 경험했고, 약자의 눈물을 보았다.
1949년 이화여중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간 가족과 함께 부산 역전 마당에서 3일 밤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다섯 식구가 판자로 만든 방에서 살던 3년의 기억은 유년 시절의 김 목사에게 삶의 방향을 정해 주었다.
중학교 때 친구를 따라 간 교회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눴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죄인과 병자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영혼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신 예수가 그 안에 들어왔다.
섬김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가진 이상, 다른 어떤 것도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유난히 총명했던 유년의 김 목사는 법대를 가길 원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1959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한국신학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사회복지기관에서 나환자촌 재활 프로그램을 담당하기도 했다.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온 김 목사는 42살 되던 해 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사회사업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정신질환 카운슬러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정신병원 및 정신건강원 등에서 정신질환, 마약중독자로 살아가는 노숙자들을 도왔다.
노숙자를 향한 한없는 사랑
김 목사는 이 때부터 노숙인을 향한 목회 소명을 가지고 1987년 쉰이 넘은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미국장로교 총회에서 홈리스 사역 담당 목사로 섬기며 순회강연 강사로 활동했다. 1991년에는 여성노숙인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김 목사는 고 옥민권 목사와 시애틀 지역 목회자들과 마음을 모아 2007년부터 노숙자 전문사역단체인 둥지선교회를 설립했다. 이를 통해 노숙자들에게 집을 얻어주는 일, 직업 훈련, 이들을 신앙의 리더로 훈련시키는 '노숙자 지도자 수양회'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특히 매년 성탄절을 기해 노숙자들에게 편안한 숙소와 함께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는 '크리스마스 선물방'으로 노숙자들에게 사랑을 전했으며, '교육으로 빈곤의 쇠사슬을 끊자'라는 모토로 홈리스 교육재단을 설립해 홈리스와 빈곤 성인들의 대학 진학을 도와왔다.
그는 미국장로교(PCUSA) 은퇴목사로 일생을 정신문제를 가진 노숙자를 섬기는 사역에 헌신해 왔으며, 미국장로교에서 수여하는 '믿음의 여성상'과 '노숙자의 영웅상', 대한민국 정부의 국민포장상과 모교인 이화여고에서 수여하는 "이화를 빛낸 상"을 수상하는 등 사회 봉사상만 20번 넘게 받을 정도로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빛을 드러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