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Photo : 기독일보) 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아굴은 솔로몬 시대의 현자요 랍비로서 야게라는 사람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아굴이라는 이름은 '수집자'를 뜻하는데 그는 솔로몬 곁에서 국사를 조언하고 백성에게 잠언을 가르치며 예부터 전해오던 잠언들을 편집한 학자였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솔로몬 시대에 지혜를 전수하는 모임에 속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지혜를 전하는 스승의 역할을 했다. 아굴은 특별히 잠언 30:1-9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기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신앙인에게 있어서 기도의 모범이 되고 있다.

기도에는 기도를 하는 사람의 영성을 비롯 인격이나 관심사 등이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이유로 누군가에 대해서 알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이 하는 기도를 돌아보면 된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역대상 4:10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나 욥기에 등장하는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기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실 때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따라 일을 이루신다. 이에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그분의 사역에 동참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아굴의 기도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얻기 원한다.

겸손으로 행하는 기도자가 되라

성경에 보면 수많은 기도의 사례가 나타나 있다. 광야에서 아말렉을 물리친 모세의 기도, 태양을 중천에 머물게 한 여호수아의 기도, 자신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한 히스기야의 기도, 하늘에서 불을 내렸던 엘리야의 갈멜산 기도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의 사례를 통해서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났던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기도할 때마다 놀라운 방법을 통해서 기적을 나타내주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는 이와 같은 기도와 비교해볼 때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아굴은 무엇보다 겸손한 심령으로 기도했는데 그의 기도는 소박하고 현실적이며 단순함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처럼 수년 동안 오지 않던 비를 내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기드온과 같이 표적을 구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여호사밧처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본문 2-3절에 보듯이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하면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겸손한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아굴은 더 나아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혜와 지식에 목말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연구하는 가운데 그로부터 지혜를 배우고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아굴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서 계속 배울 수 있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자신을 죄 많은 인간이나 짐승처럼 자랑할 것이나 보여줄 것도 없는 존재로 낮추는 겸손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자신은 지혜도 지식도 없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하찮은 죄인에 불과하다고 스스럼없이 고백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으로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지식이 없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화려한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온전한 인생이라 할 수 없다. 인생에 영원한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식을 얻는 비결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나 삶과 경험을 통해서 일평생 알아가고 배워가며 체험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마다 그분 앞에 나가는 그날까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계속 자라가야 한다는 말이다. 특별히 아굴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갈망하는 가운데 그분에 대한 영적 배고픔과 갈증을 드러내고 있었던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자는 이와 같이 겸손함으로 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은 아굴과 같이 미련함은 물론 결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숨김없이 고백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굴하거나 교만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그분은 교만한 사람의 기도는 듣지 않지만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잠언 기자는 잠 3:6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가르치고 있다. 이에 기도로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마다 그분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의지함으로 간구할 수 있어야 한다. 아굴처럼 온전한 기도자의 자세로 창조주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직함으로 구하는 기도자가 되라

잠언 30:1-9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에 있어서 핵심적인 내용은 7-9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평생을 기도한 사람이었는데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말한다. 이는 죽음이라는 숙명을 앞 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부르셔도 그분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이다. 아굴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 거짓 없는 진정성 있는 기도를 드리기 원했다. 한마디로 그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정직으로 주님께 나가는 기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원했던 것이다.

아굴은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을 구하는 지혜가 있었는데 무엇보다 정직한 삶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다. 본문 8절에 보듯이 자신에게서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허탄이란 헛되고 거짓되며 속이는 것들을 얘기하는데 세상에는 영과 육으로 거짓되고 허황된 것들이 많이 있다. 거짓말이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행하는 속임수나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것들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삶의 현장은 물론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한다. 그리하여 허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따라 살기 원했던 아굴은 허탄하고 거짓된 삶을 이루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망령된 생각이나 행실을 일삼지 않고 오직 신실하고 거짓이 없는 삶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땅에 거짓을 얘기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오늘도 우리는 거짓이 일상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성경에 보더라도 인류는 거짓에 속고 속이는 가운데 허탄한 역사를 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도 애굽에 갔을 때 자신의 아내를 빼앗길까봐 누이라고 속이는 우를 범했다.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을 보더라도 사울에게 쫓길 때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면서 위기를 모면했던 일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거짓된 세상과 환경에서 지켜주시되 벗어나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정직을 추구하는 기도자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거짓말은 하나님의 속성에 맞지 않으며 거짓은 사단이 좋아하고 원하는 일이다. 이에 요 8:44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바울 또한 디도서 1장에서 영생에 대해 가르치는 가운데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 말씀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원하는 사람마다 거짓이 없으신 주님께 정직함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루터가 교훈하는 것처럼 성공적인 기도를 이루려면 먼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아굴이 말씀하듯이 세상의 허탄한 것이나 거짓을 좇지 않으며 오직 정직함으로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의 뜻을 따르는 기도자가 되라

아굴의 기도에 있어서 두 번째 핵심적인 교훈은 물질을 구하는데 있어서 주의 뜻을 따르라는 말이다. 그는 "우리로 부하게도 마시고 가난하게도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거나 가난에 찌들어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아굴의 중심된 생각은 그가 부하거나 가난해짐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염려하는데 있었다. 그의 삶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면 가난하거나 부요한 것이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도 37:4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네 소원을 이루시리라" 말씀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함으로 자신의 소원을 완성하라는 말이다. 창조주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드릴 때 삶에 있어서의 많고 적음, 부하고 가난함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굴의 기도는 인간의 한계와 모순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다. 사람은 누구든지 배부르면 배부른 대로 배가 고프면 배고픈 대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아굴은 부하게도 말고 가난하게도 말아서 오직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간구할 수 있었다. 이는 일찍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보장해달라고 기도하도록 하셨던 주님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과거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 광야에서 일용할 만나를 허락해 주셨다. 그런데 누군가 욕심을 부려서 만나를 많이 거두어 이튿날까지 남겨 두면 벌레가 생기고 썩은 냄새가 났다. 하나님은 철저히 하루 하루 일용할 양식을 주셨는데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남겨 두었을 경우에만 허락해 주셨다는 말이다.

아굴은 여기에서 물질적인 시험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을 기도하고 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하는 말씀은 물질적인 시험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특별히 부하게도 말라는 기도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어리석은 부자가 곡간을 헐고 여러 해 쓸 물건을 비축해 놓고 만족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영혼아 내가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러나 주님은 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이와 같이 물으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리하면 네 쌓아 둔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우리는 이제 아굴이 하나님 앞에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만들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던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부자가 되어도 하나님을 모른다 하기가 쉽지만 가난할 때에도 그분에게 욕을 보일 수 있는데 그 이유가 9절 하반절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사람들은 돈이 많아야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다. 그렇다고 가난함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가난하면 이웃에 덕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주님께도 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물질을 사용하는 지혜를 주시는 가운데 자족할 줄 알며 이웃을 위해서 섬기고 나누라고 가르친다. 구약시대에는 물질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구제에 힘쓰라 했는데 이는 이기적인 삶을 버림으로서 그만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사도 바울은 딤전 6장에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으로서 생명이나 영혼이나 물질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지키며 사용하도록 지혜롭게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마태복음 6:33 말씀처럼 먼저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