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치과에 갔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씹을 수 없을 정도로 이가 많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저의 이를 보시더니 대뜸 하시는 말, “또 이를 악무셨군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금니에 금이 많이 가 있었고, 다른 이는 이미 부서져서 조각 나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를 악물면 나중에는 다른 이들도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경고해 주셨는데도 저는 오늘 이렇게 이를 엉망으로 만들어 오고야 말았습니다. 전부터 의사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저에게 핀잔을 주곤했습니다. “목사님, 목회하시면서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이예요.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셔도 이는 악물지 마세요. 금이간 이가 한둘이 아니예요.”

저는 목회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만큼 재미있게 목회하는 목사님들이 얼마나 될까 하면서 주로 감사하며 사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이 좀 악물지 말고 살라는 치과의사의 말은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언듯 보기에도 이를 자주 악물어서 턱에 긴장이 갈 때가 많다고 지적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아내도 맞장구를 쳐 주었습니다. 평소에도 가만있질 못하고, 자주자주 이를 악무는 습관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이를 악물고 살아가는가 봅니다.

오래 전에 내과병원에 진찰 받으려 갔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의사 선생님이 내 앞서 진찰받으시는 환자분과 이야기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만성 위장병으로 고생하시는 분 같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은 간단했습니다. “신경 좀 쓰지 말고 사세요!” 그 말을 들은 환자 분은 “예, 그러죠!” 하고는 돌아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면서 내뱉듣이 하는 말이 제 귀에 들렸습니다. “아니, 신경 안쓰고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간담…..!”

문득 그 말이 떠 올랐습니다. 나도 그랬나? 설마 그럴 줄은 몰랐는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내 육체는 이를 악물지 않고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서 이를 악물고 살아왔더란 말인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 주시고,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는 내가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신것을 매일 고백하면서 살아가는데, 도대체 뭐가 힘들고, 뭐가 어렵다는 말인가?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고자 하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원리적으로 저는 이렇게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데, 왜 그렇게 이를 악물었을까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 이는 금이가고, 부서지고,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바둥거리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평온하고, 겉으로는 즐겁게 살아가는 것 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가 부서지도록 악물며 싸우고 있었던 내 모습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치과 의사선생님 앞에서 들켜버린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내 삶과 목회 모든 것을 목자되신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겉으로만 믿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안절부절 못하는 믿음 없는 목사일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그렇게 믿음없고, 이중적인 모습으로 사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안그런데, 왜 내 육체는 이렇게 이를 악물며 살아가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만큼은 이를 악물고 해 보려고 하는 것이 제게는 있습니다. 잘 하고 있다면 이를 악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못하기에 자꾸 내 육체를 쳐서 나를 몰아가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제게 있어 기도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누리고, 평안을 누리지만, 그러나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없고, 너무나 능력이 없고, 너무나 지혜가 없어서 기도할 밖에 없습니다. 잘 안되니까 이를 악무는가 봅니다. 간절히, 끊임없이, 깨어서, 강청하며, 부르짖으며 하고 싶은 것이 제게는 기도입니다. 제게 있어 여전히 먼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