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보다, 개인의 삶 우선시하는 시대정신
단란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가정들 드러내
핵가족화 넘어 가족 해체되는 현실 반영돼
◈한부모 가정에 대한 인식 변화
2018년작 <서치>(Searching)의 감독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신작, 서스펜스 영화 <런>(Run)은 가정의 붕괴가 가져오는 공포감과 좌절감을 담은 영화라 볼 수 있다.
서사에 커다란 반전이 있는 영화이지만, 반전이 드러나기 전 단란했던 모녀 가정이 무너져 가는 모습만으로도 현실에 대한 유의미한 시사점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의 경우 전체 가구 수 대비 한부모 가정의 비율이 아직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가정의 형태에 대한 전통적 사고방식과 남성 가장 중심 경제구조의 영향으로 인해, 한부모 가정 비율은 전 세계 평균인 6.8%를 밑도는 수준이다.
물론 한부모 가정의 절대 다수가 편모 가정이라는 점은 전 세계적 추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에는 가정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의 변화와 높은 이혼율로 인해, 한부모 가정의 비율도 조금씩 늘어나는 듯하다.
얼마 전 방송인 후지타 사유리가 정자를 기증받아 비혼모가 되었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우려보다는 격려와 축하를 보냈는데, 한부모 가정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라 여겨진다.
전 세계에서 한부모 가정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1위가 미국, 2위가 영국이다. 미국의 경우 한부모 가정이 전체 가구 수 대비 약 23%, 영국의 경우 21% 수준이다.
미국은 네 가구 중 하나가, 영국은 다섯 가구 중 하나가 한부모 가정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높은 이혼율, 일반화된 미혼 동거, 가정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서구적 개인주의 문화가 겹쳐진 결과로 풀이된다.
이런 추세를 조금씩 따라가는 한국 역시 추후에는 한부모 가정의 비율이 점점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1인 가구 증가와 함께 한부모 가정의 증가는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가정 해체 풍조가 정착되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주요 서방 선진국들이 거의 반세기 전부터 겪어왔던 문제를 한국은 2020년대 들어와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한부모 가정에 얽힌 소재를 다룬 영화를 찾아보기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미국에서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였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 한부모 가정의 상황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은 대부분 세상에 둘만 남은 가족 사이의 끊어낼 수 없는 사랑을 주제로 삼아 왔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1999), <아이 엠 샘>(I am Sam, 2001),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yness, 2006) 등이 대표적이다.
차간티 감독의 전작 <서치>만 하더라도, 아내와의 사별로 인해 혼자서 고등학생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깊은 애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헐리우드에서 최근 들어 내놓은 한부모 가정에 대한 굵직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런 서사 공식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작년 개봉해 흥행과 평단의 평가에 모두 성공한 영화 <조커>(Joker, 2019), 그리고 이번에 개봉한 <런>은 모두 한부모 가정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초반 단란해 보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진실이 밝혀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비극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계가 계속해서 이런 추세를 보일지는 현재로서 미지수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가정에 대한 가치관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형성되는 세태가 영화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정이 부모의 애정으로 자녀를 온전하게 보호하고 양육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집착과 기만으로 자녀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곳이라는 점을 폭로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과 개인의 가치 역전
현실의 모든 가정이 이상적일 수는 없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인 만큼, 순기능적 측면과 역기능적 측면이 이리저리 뒤섞인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한부모 가정의 경우 부모와 자녀 간 관계에 결부된 순기능과 역기능이 자칫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양방향으로 극대화될 수 있는 어려움이 있다.
서로 절박하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애정의 끈끈함은 살아가는 데 커다란 힘을 주지만, 때로 이 절박함이 집착으로 굳어지면서 서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어려워지고, 둘을 제외한 외부 사람과의 인간관계에 서툰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한다.
영화 <조커>와 <런>은 이런 역기능이 극대화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기괴함, 광기, 그리고 서스펜스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물론 두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사실상 친모가 아니면서 자녀를 속여온 비밀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 두 작품에 등장하는 가정은 매우 단란하고 화기애애한 부모와 자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화목한 관계가 사실은 집착과 광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한국에도 이런 문제를 소재 삼은 서스펜스 영화가 존재했다. 배우 최지우와 윤소정의 연기 케미가 돋보였던 영화 <올가미>(1997)는 편모 가정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와 시어머니 간의 혈투를 다룬 스릴러 영화이다.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메시지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다른 가족 구성원의 삶을 구속하고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교훈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통상 서로 간의 애정의 깊이가 집착에 가까우리만치 깊은 한부모 가정의 역기능적 사례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사회적인 측면으로 볼 때, 이런 메시지가 영화를 통해 강조되는 추세는 핵가족화를 넘어 아예 가족의 해체를 향해 달려가는 오늘날의 현실을 적극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미국 문화는 한국과는 다른 의미로 가정의 가치를 극구 강조해 왔다. 한국 문화가 사회적 규격에 맞는 인격과 삶의 완성을 위해 가정의 가치를 중시를 강조해 왔다면, 미국에서는 인격 대 인격 간의 온전한 관계 형성을 통한 행복의 필수 요소로서 가정의 가치를 대단히 중시해 왔다.
이러한 인식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서구 문화의 뿌리를 이루는 기독교 문화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가정 내부의 부모와 자녀 관계를 하나님과 구속받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예표로 보았던 서구 기독교 문화는 온전한 부모-자녀 관계를 온전한 신앙의 한 증표라고 여겼다.
물론 이 온전한 관계는 존재적 질서를 인정하는 상하 관계와 함께 서로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수평적 신뢰관계가 함께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런>에서 엿보이는 한부모 가정 내부의 진실 폭로, 그 깊은 애정 관계의 역기능적 성격에 대한 고발은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볼 때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양측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정보다 먼저 개인의 삶을 앞세우는 오늘날의 세태 가운데는 무조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