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전송 기술, 영생의 길 은혜 아닌 돈, 권력으로
머스크의 행보, 구속 신앙 근원으로부터 잠식 결과
기술적 진보, 문화적 발전에 감춰진 분별력 갖춰야
◈인격의 가능성: 새로운 존재가능과 정체성의 파괴
뉴럴링크 프로젝트는 인간을 AI화(化)하겠다는 일론 머스크의 사명감 넘치는 전망을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고, 작게나마 가시적인 성과들을 하나하나 쌓아나가고 있다.
머스크는 두뇌에 이식된 마이크로칩을 통해 인간 신경계의 작동 패턴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 데이터를 활용해 본래의 인격과 동일한 패턴의 사고방식, 감정, 의지를 가진 '인격 소프트웨어'를 작성하는 기술, 즉 정신 전송 기술을 구현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복제돼서 다른 하드웨어(신체)나 디지털 스페이스에 이송된 소프트웨어를 과연 원래의 사람, 원래의 인격이라 할 수 있을까?
디지털화된 인격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 여러 방면의 접근이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한 인격의 존재적 가능성, 줄여서 '존재가능'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문제를 다뤄보려 한다.
현대 실존철학 대가 중 하나인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일정한 범위의 자유, 즉 유한한 자유가 존재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인간의 삶은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범위 안에서 자기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는다. 혹자는 인간이 지닌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부르짖지만, 이를 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실제 현실에서 인간의 삶의 가능성은 그 처해 있는 삶의 자리, 삶의 정황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2,000여년 전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이스라엘에 태어난 어떤 사람이, 2020년 현재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는 없다. 이는 그 사람에게 허락된 가능성의 범위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바는 인간이 처한 삶의 자리의 본질, 즉 시간과 공간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인, 죽어 사멸할 수밖에 없는 몸을 통해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며 거기에 형성된 고유한 세계 안에서 살아간다. 이 가능성의 한계, 근원적인 유한성이 바로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닉 보스트롬, 레이 커즈와일, 그리고 일론 머스크 등의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이러한 가능성의 확장과 통제를 꿈꾼다.
정신의 복제 혹은 정신 전송 기술은 궁극적으로 몸의 교체를 지향하는데, 이 육체의 교환은 단순히 한 인간 존재자의 존재를 연장시키는 데만 국한되지 않고 그 사람에게 주어진 존재가능의 폭과 선택방식 자체를 바꿔놓는 데까지 나아간다.
▲뉴럴링크가 개발한 브레인칩의 이식 방식. ⓒneuralink.com 캡처 |
실존철학은 애초 인류의 자연적 존재방식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정신 전송 기술을 통해 한 인격의 존재가능에 급진적 변화를 일으키면, 그것을 더 이상 기존의 인격이나 인류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 정신 전송이 더 이상 인류라 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종류의 존재자를 창조하는 일로 이해되는 것이다.
혹 인간이 클론을 창조해 생체적으로 정신의 패턴을 복제해 전송하더라도, 새로운 신체가 이미 기존 신체의 존재가능, 특히 시간적 가능성(죽음의 한계)을 뛰어넘은 이상 그 정신적 기제를 기존의 인격 혹은 인류와 동일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류에게 삶은 단 한 번뿐인데, 정신이 복제된 클론은 그 범위를 뛰어넘은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말아야 할 때와 장소에 존재하는 복제된 인격은 더 이상 기존의 인격도 인류도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받은 이종(異種)의 존재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고 및 행동 패턴은 기존 인간과 유사하지만 과와 종이 완전히 다른 새로운 류(類)의 존재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인격의 정체성: 정신 전송을 통한 새로운 영생의 꿈
이러한 측면에 국한해 본다면, 실존철학의 인간 이해는 창조론적 인간 이해에 가깝다. 인간의 존재는 보다 위대한 존재, 보다 근원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가 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 주어진 가능성의 범위를 벗어날 때 인간은 스스로의 인간됨을 포기하는 셈이 된다.
여기에 반해 진화론을 믿는 자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주어진 범위, 한정된 범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한계 없이 증가할 수 있는 '정도(degree)'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진화는 기존의 가능성을 극복하는 일인 동시에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신 전송 기술을 통한 몸의 교체는 원래 인간의 가능성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일로 파악된다. 이로써 진화의 길을 바라보는 이들은 정신 전송이 인간의 정체성을 결코 무너뜨리지 못한다고 믿게 된다.
오늘날 대중문화 콘텐츠 전반은 후자의 입장을 택해 사람들을 교육시킨다. 정신 전송 기술을 주된 소재로 삼는 콘텐츠들, 예를 들어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나 최근 공개된 TV 시리즈 <얼터드 카본>같은 작품은 전송된 정신을 기존의 인격과 동일시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특히 <공각기동대>의 경우 정신 전송 기술이 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류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킨다는 사상을 노골적으로 주입하려 한다.
▲<공각기동대>의 정신 전송 장면. |
<공각기동대>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이러한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과 일본 선불교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진화된 존재자가 기존의 존재자와 확고한 존재적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변증하기 위해 고린도전서의 구절을 인용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작품 속에서 정신 전송 전의 존재자(어렸을 때)와 정신 전송 후의 존재자(장성한 사람)는 결론부에 가서 결국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동일 인격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 둘의 동일성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아직 장성함에 이르지 못한 상태로 규정되고 있다.
마모루 감독은 이러한 생각을 한층 더 설득력 있게 보이도록 선불교의 존재이해를 끌어들인다. 선불교에서는 주체와 대상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사고를 버리도록 가르친다.
모든 존재자는 기본적으로 생(生)과 멸(滅), 존재와 허무의 얽힘을 통해 현상적으로 존재한다. 이때 존재의 측면에 집착하면 세계 내부의 모든 존재자들이 제각각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자들로 구분된다.
그러나 허무의 측면을 바라보면 모든 존재자들은 결국 죽음과 소멸에 잠식될 것들, 공허함을 근원삼는 것들로 확인된다.
이에 교토 학파를 위시한 선불교 사상가들은 근원적 공허함 안에서 지극히 유한하고 불안한 존재와 이를 뒤덮는 허무가 하나로 얽혀 공존하는 것, 생사일여(生死一如)의 현실을 참 실재라고 여긴다. 이런 근원적 실재 안에서는 각 존재자의 구분이나 구별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신 전송 이전의 인간 존재자를 이루는 삶의 현상이나 정신 전송 이후의 새로운 존재자를 이루는 현상 모두 그 공허함의 본질이라는 면에서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양측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기존 존재자의 신심(身心)을 중심으로 정립된 정체성은 인위적이고 비실재적인 이념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되고 만다.
▲정신 전송이 일상화된 미래를 묘사한 TV 시리즈 <얼터드 카본>. |
<공각기동대>에서 설파된 이러한 메시지는 결국 구속 없는 영생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영생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우리 영혼이 누리게 되는 은혜로 규정된다.
그러나 만일 정신 전송 기술이 기존의 인간 정체성 훼손 없이 그 존재를 존속시키는 것이라 한다면 '연속적 정신 전송=영생'이라는 도식이 성립되게 된다.
이 경우 인간이 영생을 얻는 길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돈과 권력이 된다. <얼터드 카본>에 등장하는 '므두셀라'들, 돈과 권력을 힘입어 정신 전송을 수백년간 반복하는 이들이 곧 영생하는 이들이 된다.
<얼터드 카본>은 이처럼 영생조차 돈과 권력 소유 여부에 따라 갈리게 되는 암울하고 어두운 미래상을 그려내고 있다.
머스크가 뉴럴링크 프로젝트를 통해 꿈꾸는 미래 세계의 모습이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머스크의 행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신앙을 근원으로부터 잠식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뉴럴링크 프로젝트의 진전 소식은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낭보가 아니라 비보인 셈이다. 기독교인들의 앞길에 다른 하나의 거대한 믿음의 걸림돌이 솟아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술적 진보, 문화적 발전 이면에 감춰진 올무를 벗어나기 위한 분별력을 갖출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는 하나의 커다란 계기라 할 수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