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청교도 사상과 청교도 운동은 유럽의 근대화에 훨씬 더 넓고 큰 영향을 발휘했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8세기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들을 지켜내고 있는 것은 청교도 사상이요, 청교도 정신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인류가 오늘의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은 결코 청교도들이 남긴 유산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청교도 사상에서 유래되었고, 그래서 수없이 많은 피를 흘린 사람들의 희생에 근거해서 발전되어져 나온 것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청교도의 기여와 성취는 뉴잉글랜드에 건설된 미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 역사의 근대화에 대한 수많은 이론들이 난무하지만, 먼저 미국의 역사와 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청교도 운동이 남긴 위대한 유산 중에서 미국의 정치와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결정적인 원리들이 청교도들에게서 나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 세계는 오랫동안 신분제 사회로서 한 사람의 국왕에게서 출생한 후손들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마음대로 폭정을 하는 일들이 지속되었다. 그 주변에는 일부 귀족들이 지역을 나눠서 다스리던 봉건체제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국왕도 국가의 법률을 지켜야만 한다는 "입헌군주제"를 제기하였다.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서, 귀족들과 시민들의 의견을 전혀 무시하고 의회를 폐지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짓밟은 찰스 1세를 처형하였다. 전제군주의 시대에서 사회계약론으로 넘어가는 첫 단계, 근대사회가 열리는 엄청난 변화의 관문을 청교도들이 열어놓았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국왕의 전제정치에 맞서서 독립국가를 성취하였고, 시민들의 참여와 평등한 인권존중의 나라, 아메리카 합중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결정적인 근거는 청교도 운동의 강력한 영향력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와 17세기가 지나가고 난 후, 근대 민주주의 운동과 혁명의 시대가 다가왔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볼세비키 공산주의 혁명은 혼란과 무질서와 계급화를 빚어냈고, 실패하였다. 청교도 운동은 심령의 감화를 통해서 직업과 가정과 사회를 새롭게 하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도록 하는 진리의 기준과 윤리를 확고히 제시하였다.
첫째는 청교도들에 의해서 근대 사회의 경제체계를 뒷받침하는 "자본주의"(capitalism)가 잉태되고 발전되었다는 평가는 매우 주목을 받아왔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pitalismus, 1904-5)은 지금까지 그 주제에 대한 논쟁이 되고 있다. 베버의 논지는 경제발전에서 문화적인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일반적 주장이다.
그는 특히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윤리적인 생활에는 근면, 성실, 절약 등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윤리적 생활이 곧 자본주의를 축적하게 했다는 것이다. 베버의 사회진단에서는 문화적인 요인들이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에 있어서 근원적인 요소로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청교도들의 생활 철학은 근대 경제적인 인간의 요람이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 배면에는 칼빈주의 예정 교리가 자리하고 있어서, 잉글랜드와 미국의 경제적인 역동성이 형성되도록 기여했다고 진단했다. 또한 베버는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는 벤자민 플랭클린의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청교도들은 사치를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윤리에 대해서 주목했다.
이 책이 나온 후 지금까지 "베버의 논지"는 근대 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 경제역사 교수 데이빗 란데스 (David Landes, 1924- 2013) 는 한 국가의 풍부와 빈곤을 추적하면서, 문화적 요소들이 결정적으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베버의 논지를 옹호하고 있다. 베버 학파에서는 사회변화를 정확히 진단하는데 있어서, 물질적인 요소들보다 정신적인 요인들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하게 이념적인 요소들만이 더욱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려했던 것도 아니다.
청교도들이 칼빈주의 예정교리의 영향을 받아서, 매우 근면하게 살아가는 심리적인 상태를 형성케 했다는 부분은 대단히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베버는 청교도들의 마을은 풍요하고 부요하지만, 오랫동안 변화를 겪지 않은 로마 가톨릭 마을사람들은 전혀 성취의욕도 없고 열심히 노력하려는 자세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기본적으로 청교도 신앙의 핵심이 예정교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청교도 신학을 집약시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 소 요리문답서에 집약되어있기 때문이다,
베버가 검토한 바, 청교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고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면서, 그들의 수입을 저축하고 투자했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 청교도들은 칼빈주의 교리를 철저하게 신봉하면서, 세속화된 사회에 물들지 않고 금욕주의를 실현하였으며, 자본주의가 잉태되는 정신적인 토대를 제공했다고 보았다. 1958년 미국 경제사학자 렌스키가 더 많은 근거들과 통계 자료를 제시하면서, 베버처럼 요한 웨슬레도 역시 동일한 입장으로 청교도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고 주장했다.
칼빈주의와 자본주의를 연계시킨 베버의 저술은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쪽으로 완전히 양분되어 있다. 베버와 뜻을 함께하는 연구자들은 주로 사회학자들이 많다. 미국 기독교 사회학자 토니는 청교도가 17세기에 경건의 생활화로 개인적인 경제활동을 하면서 이익을 축적하는 자본주의를 새로이 형성했다는데 동의한다. 이러한 논지를 지지하는 사회학자들이 많은데, 국가적으로 시민들의 복지를 지향하는 경제적인 구조를 창출해 냈다는 것이다. 막스주의학자 크리스토퍼 힐은 경제적인 변화로 나타나는 것들은 이데올로기적인 발전의 원동력으로 간주한다. 미국 경제발전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청교도 윤리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론은 "신 베버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청교도들의 경제활동은 아직 근대 산업사회의 생산구조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둘째, 청교도들의 의회정치가 근대 혁명을 가져온 정치적 발전의 전형이자 근거가 되었다는 평가도 주목하여야 한다. 프랑스 자코뱅 혁명과 볼세비키 혁명을 거치면서, 유럽의 정치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는데, 그들이 등장하기 이전에 청교도 혁명이 더 근원적인 정치발전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16세기와 17세기에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네델란드 등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종교전쟁이 지속되었었다. 청교도 혁명은 근대 개인주의 혁명과는 차이점이 크지만, 근대 민주주의 인권존중 사상이 시작된 발아지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왕정복고와 함께, 전제군주제와 주교체제, 귀족주의와 전통적인 문화로 되돌아가 버렸지만, 결코 청교도 혁명의 노력들은 영국 민주주의 발전에서 헛되지 않았다.
오늘날의 미국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청교도의 신앙과 정치적인 이상은 미국의 정체성과 정치적인 기준을 세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청교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오늘날 세계 최고 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정체성을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제임스 모론의 정치적인 분석은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무한대한 자유를 주장하는 개인주의와 세속화된 국가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코 그렇게 겉모습만을 드러내는 한두 가지 사건들에 의존해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초, 중, 고등학교에 재학하는 모든 학생들은 1630년대의 보스톤과 청교도 윤리와 정신을 배우고 익히면서 자라난다.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 시대에도 미국이 전 세계를 향하여 도덕적 정치를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었다. 미국인들의 정치적 기초는 탁월하고 고상한 청교도적 도덕에 기인하고 있다.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를 건설하려던 청교도들은 거룩한 공동체를 꿈꾸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청교도들이 노동과 결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상적인 삶의 교리를 발전시켰다고 평가했다.
셋째, 로버트 머튼은 청교도 운동이 새로운 탐구와 근대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을 높이 평가하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청교도 운동의 중심지였던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가 자연과학을 중점적으로 발전시킨 학교는 아니지만, 중요한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이 청교도 후손들이라는 점은 기억할 만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