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디 선교사와 원산 부흥운동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3차례의 부흥운동이 주어졌다.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의 백만구령운동이 그것이다. 그 중에 가장 강력한 부흥운동이 1907년에 일어났던 평양대부흥운동이었고, 원산부흥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의 모체 역할을 했으며, 백만구령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의 후속활동 같은 성격을 가진 대대적인 전도운동이었다. 이번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원산부흥운동이 어떻게 일어났고 어떻게 평양대부흥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싶다.
한국 선교의 시작과 당시의 민족적 위기 상황
한국교회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런던대학을 갓 졸업한 웨일즈 출신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23세에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중국 땅에 도착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후 조선말을 배워 조선 선교를 준비하다가 1866년 8월 미국상선 General Sherman 를 타고 평양에 통역관 신분으로 갔다가 성경을 나누어주고 순교하게 된다. 그의 순교소식은 영국과 미국의 선교보고지에 보도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이 서구 기독교계에 알려져 수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는 계기가 된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라가 정식 첫 선교사로 들어온 이후 계속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조선정부가 이를 평정하기 위해 청군을 끌어들이자 일본이 조선을 선점해 대륙정복의 전초기지를 삼기 위해 청일전쟁을 일으켜 일본이 승리한다. 러시아가 남하정책과 부동항을 얻기 위해 조선을 노림으로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게 된다. 1905년에는 일본이 명성황후까지 죽이면서 한반도 지배권을 강화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조선은 나라를 방어할 아무런 힘이 없어 하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원산 부흥운동의 시작
당시에 중국 의화단사건(1899-1901년 기간에 청나라에서 일어난 외세 배척운동으로 민간 결사대들이 일어나 외래적인 것들을 파괴하고 많은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을 피해 원산에 와 있던 남감리교 여선교사 Mary White 과 카나다장로교 여선교사 Louise McCully 두 여선교사가 암담한 조선을 위해, 조선교회와 선교사들 가운데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함으로 부흥의 불길이 점화 된다. 이 두 선교사의 기도 모임의 소식이 알려지자 원산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이 이 기도 대열에 참석 하게 되었다.
1903년 8월 24일-30일 기간에 원산지역 선교사님들은 공개적 기도집회를 열고 토론토 의과대학 출신으로 원산에 파송되어있던 하디 선교사에게 "효과적인 기도를 위한 필수 요소들"에 대해 3회의 강의를 부탁한다. 당시 하디는 학력으로나 직업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가는 곳마다 노력에 비해 열매가 초라한 실패한 선교사였다.
원산 부흥의 주역으로 쓰임 받은 하디 선교사
로버트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 한국이름 하리영)는 1865년 카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 후에 잠시 교사로 일했으나 대학 2학년 때 SVM운동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선교사의 꿈을 가지게 된다. 의사가 되어 병든 이웃들을 돕고 싶어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이 세상에 아주 유익한 존재가 되겠다" 고 삶과 비전을 나눈 동지 마가렛 켈리와 결혼한다.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선교사로서 토론토 지역 의대생들로 구성된 기독청년회의 파송을 받아 8년 계약으로 아내와 함께 부산으로 오게 된다. 부산지역과 서울 제중원, 다시 부산에서 의료선교사로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8년 계약이 끝나자 감리교 원산 선교부의 초청을 받아 남감리교 선교사로 원산에서 사역하게 된다. 원산에 주재하면서 의료선교사역과 함께 강원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교회를 설립하게 되는데, 1901년에 15명에게 세례를 주고 강원도 최초의 교회인 지경터교회를 세웠고, 같은 해 10월에 양양교회를 세웠고, 이어 강릉중앙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사역의 열매들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1903년 8월에 열리는 원산 주재 선교사 기도회의 강의를 준비하던 중에 누가복음 11:13 말씀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자신의 사역 실패의 원인이 성령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기도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회개하던 하디는 기도회 강의시간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자기 사역 실패의 원인인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했다. 성령님께서 고백하게 하심에 따라 '명문 토론토 의대 출신이라는 학력과 의사라는 신분에 대한 교만함, 백인 우월주의, 조선인들을 미개하고 무식한 백성으로 생각했던 오만,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실력과 학력을 의지했던 영적 무지와 미숙과 어리석음'등을 눈물로 모두 자백함으로 선교사님들의 기도회는 내내 눈물의 회개로 이어졌다.
그 다음 주일에 자신이 맡고 있던 원산감리교회의 주일예배에서 또 다시 자신의 교만함, 조선인들을 무시함, 백인과 의사라는 신분으로 인한 우월감, 성령충만 못함을 솔직히 눈물로 고백한다. 그러자 하디의 회개가 성도들의 공개 회개로 계속 이어져 선교사들과 성도들의 통회를 동반한 부흥이 원산 전역으로 확산되게 된다.
은혜 받은 하디는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처럼 얼굴에 은혜의 광체가 났고 눈빛이나 성품이 180도 달라졌다.
전에는 조선인 환자들이 하디의 거만함과 쌀쌀함 때문에 차라리 아픈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참고 하디에게 치료받으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은혜받은 후의 하디는 표정과 성품과 어투가 완전히 변해 하디가 환자의 손만 만져도 병이 나았다고 한다. 자신이 인도하는 모임에 성령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자 하디는 그가 처음 세웠던 교회이자 자신에게 실패감을 안겨주었던 지경터교회를 찾아가 12일간 집회를 인도했다. 원산감리교회에서 처럼 자신의 눈물의 회개가 있었고, 원산감리교회에서 처럼 성도들의 참회가 동반된 영적각성이 일어남으로 성도들이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1904년에 하디는 서울과 개성에서 집회를 인도했는데 모두 똑같은 성령의 강한 역사와 회개를 통한 각성운동이 일어 났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에게도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학생들이 서로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안식년을 떠나기 전에 하디는 서울, 제물포,평양에서 집회를 인도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성령님이 그와 함께하심으로 부흥이 언제나 그를 따라 다녔고 가는 곳마다 회개와 각성운동이 계속 이어졌다.
안식년에서 돌아와 1906년 8월 26일-9월 2일 기간에 하디 선교사를 강사로 평양 선교사 가족사경회가 열렸다. 하디는 자신이 변화되기 전의 교만과 성령에 대한 무지, 주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는지에 대한 간증과 회개, 그리고 요한일서를 중심으로한 하디의 성령께 사로잡힌 설교는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큰 은혜와 도전을 주었다.
장대현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Graham Lee(이길함) 선교사와 로제타 셔우드 홀과 그녀의 아들 12살의 셔우드 홀등 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이길함 선교사가 섬기는 장대현교회는 이후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교회가 되었고, 어린 셔우드 홀은 이 때 큰 은혜를 받고 사업가의 꿈을 버리고 부모님 처럼 의료선교사가 되어 한국에서 사역을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후에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한국에 돌아와 해주에 조선 최초의 결핵요양원을 세워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많은 생명들을 살렸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구입했던 크리스마스 씰도 셔우드 홀이 결핵환자들을 돕기위해 시작했었다.
존스톤 목사의 방문과 도전과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회
곧 이어 1906년 9월에 미국 북장로교단 선교위원이자 부흥사인 Haward Johnston 목사가 서울 선교사 사경회에 강사로 왔다. 그는 부흥운동이 불타고 있던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현장을 다녀와 그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운동의 생생한 소식들을 전하면서 조선주재 선교사들과 조선교회 지도자들에게 더 큰 부흥을 사모하라고 강한 도전을 주었다. 서울 선교사 사경회에서 돌아온 20여명의 평양주재 선교사들은 평양에도 그런 대부흥이 임하도록 매일 정오기도회를 곧 바로 시작한다.
존스톤 목사는 이어 평양을 방문하여 이길함 선교사가 담임하는 장대현교회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하면서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나고있는 생생한 부흥의 소식을 전한다. 이 때 "조선에 부흥이 임하도록 누가 웨일즈의 이반 로버츠 처럼 기도의 불씨가 되고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겠느냐" 고 도전했다. 이 때 길선주 장로가 손들고 "내가 조선의 이반 로버츠가 되고 싶소"하고 일어섰다. 존스톤 목사는 장차 조선에 큰 부흥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길선주 장로를 위해 뜨겁게 기도해주었다.
이리하여 평양에 부흥을 사모하는 간절한 기도회가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매일 정오에 열렸고, 길선주장로가 중심이된 매일 새벽에 열려 평양에 부흥을 보내주시도록 주님의 보좌 앞에 기도의 향이 올려졌다. 부흥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평양대부흥'이라 부르는 대부흥을 보내시게 된다.
한국에 부어주신 대 부흥은 이렇게 두 여성 선교사의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누가 오늘의 미국의 부흥을 위해 두 여자 선교사와 같은 기도를 시작하겠는가?
이 시대의 부흥을 사모하는 작은 종 강순영목사(JAMA 대표)
*원산 부흥운동의 글은 박용규 교수님의 "세계 부흥운동사"에서 허락을 받고 많이 인용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