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 무렵 미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했다. 노예문제로 국가는 남북으로 분열될 위기였고 갑작스런 경제공황으로 나라가 휘청했다. 이 때 뉴욕 맨하탄 풀턴 거리에서 예레미아 란피어를 중심으로 평신도중심 정오기도운동이 일어난다. 1857-1859년 2년 동안 일어났던 이 기도운동으로 100만 명(어떤 기록에는 200만 명)이 예수님께로 돌아왔고 국가는 남북전쟁 후 서로 용서하고 하나가 된다.
이 기도부흥운동은 미국 전역뿐 아니라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영국, 남아프리카 부흥운동으로 번졌고, 50년 이상 지속되어 무디 부흥운동, 학생자원선교운동으로 이어지고 세계적 부흥운동으로 연결된다. 한 사람의 마음에 붙은 기도의 불길이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수많은 사람을 구원받도록 했다. 이런 기도부흥이 다시 이 나라에 불붙기를 사모하며 평신도 정오기도모임을 소개한다.
당시 미국의 위기상황
정치적으로는 노예문제로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 전쟁의 위기감이 감돌았다. 한 교회 안에서도 노예문제로 두 파로 나뉘었다. 경제적으로는 북서부의 엄청난 농산물의 수확과 철도를 통한 운송,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으로 인해 큰 호황을 누리면서 사람들은 황금을 쫓느라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1857년 갑자기 극심한 경제공황을 만나 수많은 은행들과 기업들이 파산하고 증권은 폭락했으며 맨하탄에서만 실업자들이 3만 명이 생겨 그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신앙적으로도 윌리엄 밀러의 잘못된 재림론으로 인해 그가 예언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 번이나 불발하자 기독교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856년 12월 피츠버그에서 열렸던 장로교 총회는 부흥을 주제로 모였고 총회에 참석했던 200여명의 목사들이 1월 첫 주에 부흥을 주제로 설교하기도 했다.
기도회를 점화시킨 예레미아 란피어
이 때에 기도의 포문을 열었던 사람이 맨하탄에 소재한 화란개혁교회의 평신도선교사인 예레미아 란피어 였다. 그는 기도모임을 생각하며 길을 걷다가 점심식사를 위해 수 많은 직장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정오기도회를 착안한다. 이를 위해 그는 1857년 9월 23일 부터 수요일 정오에 풀턴 Street 에 있는 화란개혁교회 3층에서 사업가들을 위한 정오기도회를 시작한다는 전단을 만들어 뿌리고 기도로 준비한다.
9월23일 정오에 예고한 장소에 갔으나 실망스럽게도 아무도 오지 않아 혼자 기도하다가 35분이 지난 후에 6명이 참석해 함께 첫 기도회를 가졌다. 다음 주에 14명, 그 다음 주에 23명, 그 다음 주에 100여명으로 불어나고 기도의 열기도 뜨거워지자 매일 정오기도회를 갖기로 결정한다. 이 기도회는 다른 도시들로 번져가기 시작했는데 1858년 봄에는 뉴욕주에만 매일 5만 명 이상이 모였고 모일 수 있는 모든 장소들 즉 예배당, 극장, 소방서, YMCA 에서 기도회가 열렸다.
1857년 11월에는 필라델피아로 번져갔는데, 11월 23일 몇 명의 대학생들과 졸업생들이 마음에 부흥의 부담감을 안고 매일 조그만 살롱에 모여 회개의 기도를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점점 불어났고 1858년 3월10일에는 2500명이 모여 기도했다. 장소를 넓히자 곧 6000명의 기도인파가 모이게 되었고, 3월 말에는 교회들이 문을 열어 매일 3-5차례씩 기도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몰려오는 기도 인파를 위해 당시 2000불을 주고 큰 천막을 구입해 1858년 5월부터 대형 천막에서도 모였는데 5월 부터 4개월간 연인원 15만 명이나 참석했고 약 1만 명이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기도회는 뉴저지, 알라바마, 시카고, 보스톤, 워싱턴, 볼티모어, 리치몬드, 뉴올리언즈, 세인트루이스, 피츠버그, 신시네티 등 수 많은 도시들로 번져갔고 대학들로 번져갔으며 선박들에까지 번져가 선박기도회가 열렸고 선박 안에서도 수백 명씩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이 기간에 여러 도시들에서 수개월 동안 많은 교회들이 매일 3-5차례 기도회를 열었다. 대부분의 상점들은 12시 5분 전에 기도회에 가도록 벨을 울려주었다. 많은 상점 문에는 "기도회가 끝난 다음 영업을 시작합니다" 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1857년에 시작한 기도부흥은 1959년 까지 계속되었는데 대도시는 물론 군소도시와 시골까지 널리 확산 되었다. 매사추세츠 주에는 150개 지역, 뉴욕 200개 지역, 뉴저지 60개 지역, 펜실바니아 65개 지역, 오하이오 200개 지역, 인디아나 150개 지역, 일리노이 150개 지역, 미조리 50개 지역, 아이오와 60개 지역 등 동부의 모든 지역에 정오 또는 저녁에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동부지역을 여행했던 사람들은 어느 도시를 가든지 그 도시에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기도회마다 성령님의 임재로 인해 은혜가 넘쳤다고 증언하고 있다.
평신도 정오기도운동의 특징
1, 특별한 부흥사의 설교가 없이 평신도들이 중심이 된 자유로운 기도운동이었다. 간단한 찬양으로 시작해 개회기도를 드리고 성경 한 구절을 읽고 기도요청, 권면, 기도시간을 가졌다. 각각의 기도요청에 따라 기도하되 각 개인의 코멘트나 기도가 5분을 넘지 않게 했다. 기도회가 정확히 1시에 마치도록 1시5분 전에 찬송을 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함께 통회의 눈물이 그들의 볼에 흘러내렸으며 그 후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희망과 용서가 각 심령에 찾아왔다.
2, 교파를 초월하여 교회와 비지니스맨들이 참석했는데 이 기도회는 곧 전국과 유럽, 남아프리카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평신도 정오기도회의 영향력과 결과들
1, 당시 미국의 인구가 3천만이던 시절에 2년간 100만-200만 명이 구원을 받게 되는 엄청난 영적 추수가 이루어 졌다. 부흥운동의 절정기에는 매주 5만 명씩 주님께로 돌아왔으며, 어떤 마을은 전원 구원 받은 마을도 있었다.
2, 대부분의 대학들과 학교들도 이 기간 동안 부흥을 체험했는데 예일대학과 프린스턴대학은 전교생의 절반 가까이가 회심했고 많은 학생들이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기도회가 열렸던 오하이오의 어느 고등학교는 2명을 제외한 전원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고 한다.
3, 1861년에 남북전쟁이 일어났지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나라가 분열되지 않고 강한 미합중국으로 하나로 다시 연합되었다(부흥운동이 없었다면 전쟁 후에 결코 다시 하나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4, 이 기간 동안 영적, 도덕수준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웨슬리 듀웰은 "미국은 신앙과 기도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표현했다.
5, 이 기도운동 이후에 5000명의 선교사들이 세계로 파송되었다.
6, 이 부흥운동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영국과 유럽 부흥운동으로 번져갔고, 무디의 부흥운동, 학생자원선교운동으로 부흥이 연결되었다.
특별한 부흥사의 인도도 없이 한 평신도를 중심으로 맨하탄에서 성령의 인도하에 시작되었던 기도운동이 미국 전역을 기도의 불길로 뜨겁게 달구었다. 이 기도회로 인해 나라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도덕성이 새로워졌으며, 나라의 위기가 해결되었다. 이 기도의 불길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 남아프리카 등의 수많은 개신교국가들로 부흥의 불길을 점화시켰다. 주님, 지금 이 나라에 이런 은혜가 절대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운동의 불길이 이곳 미국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나 하나님을 떠난 미국인들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이 나라의 도덕성이 회복되어 국제적 존경심을 회복함으로 세계를 이끌어가게 하소서. 이런 기도운동을 우리 한인들이 점화시키게 하소서. 이 불길이 전 세계에 부흥의 불길을 뜨겁게 달구게 하소서.
이 시대의 부흥을 사모하는 작은 종 강순영(JAMA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