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서: 배경
6.25 동란, 6.25 전쟁, 혹은 한국전쟁 등으로 불리는 민족상잔의 사변(事變)은 우리 민족의 일대 수난이었다.
해방된 지 불과 5년만인 1950년 6월 25일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휴전하게 되기까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전쟁은 우리나라의 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 같은 일들이 우리를 지켜주었다.
전쟁이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1945년 이후 계속된 냉전체제와 미국과 소련 간의 대립과 패권주의의 영향이 컸다. 해방 후 좌우익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1948년 4월 3일에는 제주도 4.3 사건이, 그해 10월 20일에는 여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게릴라전을 포함한 정치적 대립으로 약 10만 명의 희생자가 생겨났다. 이념적으로 불안한 정국이었다.
1950년 5월 30일에는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나고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전체 의석 210석 중에서 이승만의 집권 세력은 겨우 30여석을 얻는데 그쳤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126명이 당선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불안정의 반영이었다.
당시 남한의 군사력은 열악했다. 병력은 북한군 201,050명의 절반인 103,827명에 불과했고, 북한의 항공기는 226대였으나 우리는 22대, 북한의 함정은 110척이었으나 우리는 겨우 36척에 불과했다. 북한의 화포는 2,492문에 달했으나 우리는 절반인 1,051문뿐이었다. 북한은 242대의 전차가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절대적인 열세였다.
6.25 직전 전방 지휘관들도 대거 교체되어 지휘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2사단장 유준홍 준장이 의정부 7사단장으로, 1연대장 김종오 대령이 원주 6사단장으로, 16연대장 이성가 대령이 강릉 8사단장으로, 국방부 1국장 이종찬 대령이 서울수도사단장으로, 8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대전 2사단장으로, 7사단장 이준식 소장이 육사교장으로 보직 변경되었다.
그런가 하면 수도사단 소속이었던 2연대가 춘천 6사단으로 예속되어 병력이 서울에서 홍천으로 이동하던 중 전쟁을 맞았다. 의정부 7사단 예비연대인 25연대도 부대이동 명령을 받고 온양에서 출발하여 목적지인 의정부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 군이 안정적이지도 못했다. 더욱이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도선에서 먼 후방에서 게릴라 소탕전을 벌이고 있어, 남침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더 심각한 현실은 '농활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장병들은 주말에 대대적인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응전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국외적으로 볼 때, 주한 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군을 시작하여 1949년 6월 말에는 군사고문단 495명 외에는 완전히 철수했다. 그해 8월에는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다. 그해 10월에는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는 김일성 정권에 힘을 부여하였고, 한반도에서 패권을 노리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깊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연설에서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 전쟁이 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우리를 지켜주었을까?
전쟁기의 다섯 가지 기적
첫째는 미국의 신속한 참전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대통령은 트루먼(Harry Truman)이었다. 민주당 출신 제35대 대통령인 트루먼은 미주리 주에 있는 사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으나, 북한군의 남침 보고를 받고 이틀 후인 6월 27일 성명을 발표하고 참전과 파병을 결정했다.
그 때에는 애치슨 라인이 유효했고, 한미 간에 방위조약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참전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트루먼은 "국경에서의 침공을 방지하고 국내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장된 한국 정부군이 북괴의 침략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침략군에게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38도선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이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전 회원국에게 이 결의를 집행함에 있어 모든 원조를 유엔에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본인은 미군 공군과 해군으로 하여금 한국정부군에 원조와 지원을 제공하도록 명령했다"고 성명했다.
그의 신속한 결단이 우리나라를 구한 것이다. 미 공군의 한국전쟁 작전 명령을 허락했고, 그 이틀 후 미 육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도록 허락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1주일도 안 되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공군과 육군을 한반도에 파견하였고, 전쟁 기간 중 파견된 미군은 40만 명이 넘었다.
트루먼의 신속히 결정 배후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간절한 호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빌리 그래함은 한국에서는 공산당이 지배하게 되면 50만 명에 달하는 크리스천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며, 미국이 자유와 평화의 파수군이 되어야 한다고 호소하여 트루먼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트루먼은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여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우리에게 독립을 가져다 주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파병을 결단하여 대한민국을 방어한 일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미군 참전으로 북한 지도부의 김두봉과 홍명희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점이 소련 문서에서 드러났다.
둘째, 유엔 상임이사국의 참전 결정도 기적이었다.
무초(John J. Muccio) 대사가 남침 사실을 보고한 시간은 한국 시간으로 25일 오전 10시였다. 국무장관 애치슨은 곧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건의했다.
12시 30분 미 국무부는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고, 25일 저녁 유엔 대표부가 안보리 소집 요구서와 결의안을 제출했다. 26일 오전 4시(한국시간)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무력 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 행위'라 선언하고, 결의안을 통해 "침략 행위 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했다.
북한군이 이를 무시하고 계속 남침하자, 6월 28일 유엔은 제2차 안보리를 소집하여 회원국들에 대해 북한의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결정했다. 유엔 연합군을 결성하여 파병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이런 신속한 회의와 결정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안전보장이사회는 5개의 상임이사국과 10개의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946년 이래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대만), 소련이 상임이사국이었고 이들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북한 편인 소련이었다. 그런데 그날 소련 대표 야코프 말리크(Yakov Alexandrovich Malik)는 회의에 불참했다. 그 결과 만장일치로 파병을 결의하게 된 것이다. 소련의 말리크가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유엔군의 참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은 유엔에 결의안을 제출하면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결의안이 통과되지 못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고, 그럴 경우 결의안을 총회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는 안을 구상하여 이 점에 대한 법률적 검토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 대표가 북한에 반대되는 결의를 하는 안보리에 불참한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점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의문 중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미스터리다.
정확하게 알 수 없어 여러 억측이 제시되지만, 『6.25 전쟁과 중국』이라는 책을 쓴 이세기 박사는 소련의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해석한다. 소련의 스탈린이 신생 강자로 부상하는 마오쩌둥을 제압하기 위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부딪치게 하여 두 나라 간의 우호관계 수립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미국이 아시아에 집중하느라 유럽에 소홀한 틈을 타서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속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련은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50여 차례 묵살하다가 1950년 초 전격 승인하고, 6월 27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는 회의에 소련 대표를 불참시켰다는 것이다. 이유가 어떠했든지, 소련 대표의 불참은 우리나라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전체 국가는 93개국이었는데, 이중 67개국이 한국을 도왔다. 전 세계 국가들 중 72%가 한국을 도운 것이다. 이 또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유일한 기록이다.
파병한 나라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태국,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등 16개국이었고, 의무지원국이 인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 5개국, 물자 지원국이 과테말라, 자메이카, 헝가리 등 40개국, 전후 복구지원국이 리히텐슈타인, 스페인, 이라크 등 6개국이었다.
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이루어진 유엔 안보리의 참전 결정이 가져온 기적 같은 결과였다. 이런 결정을 하는 동안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일을 허비하고 있었다.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는데 걸린 시간은 3일 7시간 30분이었는데, 이 소중한 3일을 허비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의 기회를 준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셋째, 인천상륙작전은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키는 기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한 북한군은 6월 26일 임진강 일대와 의정부 및 춘천을 돌파했고, 개전 3일 만인 28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30일에는 한강 도하를 시작하여 7월 6일 오산 인근을 점령하고, 7월 24일에는 대전을, 7월 말에는 목포와 진주를, 8월 초에는 김천과 포항을 점령했다.
8월 말 북한군 주력부대는 낙동강까지 진출했고, 북한군은 전쟁 개시 한 달 남짓한 기간에 낙동강 남서부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남한 지역의 90% 이상, 인구로는 92% 이상을 수중에 넣었다.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남은 지역만 점령하면 남한을 거의 전부 점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했다. 그러나 미 합동참모본부와 해군 수뇌부는 인천으로의 상륙 시도는 성공률이 5천분의 1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10m에 이르는 조수 간만의 차도 상륙을 어렵게 하지만, 수로가 좁아 대규모 선단(船團)의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상륙을 위한 LST(Landing Ship Tank, 전차양륙함)가 정상적으로 가동하려면 수심이 50미터 이상 되어야 하해서, 썰물 때는 작전이 불가능했다. 결국 상륙작전은 3-4시간 정도의 밀물 때를 이용해야 하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북한군이 좁은 수로에 기뢰(機雷)를 매설할 경우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은 미친 짓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작전의 성공을 확신하고 대통령을 설득하여 승인을 받았다.
9월 15일 항공모함과 순양함, 구축함과 제10군단 병력이 탐승한 대규모 선단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했다. 유엔군 소속 함정은 261척, 미 제5해명연대 제3대대의 선봉 공격대가 인천 수로에 진입하면서 총 7만 5천명이 투입된 작전이 시작되었다.
성공률이 5천분의 1에 불과했으나, 작전은 성공했다. 맥아더 장군의 용기와 지혜로 이룬 기적이 아닐 수 없다. 9월 16일에는 인천을 탈환했고, 인천 지역에 주둔했던 북한군 2천여 명은 거의 멸절되었다.
낙동강 방어선 돌파를 위해 총력을 다하던 북한군은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무너젔고, 보급로가 끊기면서 남한 지역의 북한군은 독 안의 쥐가 되었다. 퇴각하는 군은 오합지졸이 되었다. 이 때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손양원 목사도 이때 순교자가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에서의 전면 공격을 통한 총반격에 비해 전투 기간을 3분의 1로 단축하고, 아군 14만 명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또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도 반격 작전이 개시되어 9월 27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다.
9월 28일에는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환도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5천분의 1의 성공률을 성취한 것은 기적이었다. 그래서 군 전문가들은 '세기의 도박'이라고 불렀다. 인천상륙작전은 전황을 일거에 바꾸어 놓았다.
넷째, 흥남 탈출은 기적이었고 기적의 항해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국군과 유엔군은 그해 10월 1일에는 동부에서, 10월 9일에는 서부에서 38선을 넘어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 평양을 함락하고,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11월 21일에는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정리하면 동해안으로는 청진(淸津)까지, 중부전선에서는 혜산진(惠山鎭)의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서부에서는 선천(宣川)까지 북진했다.
그러나 10월 19일 중공군이 개입해 10월 25일 총공세가 개시되자,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함경도 개마고원 부근 장전호에서 고립된 유엔군은 처참한 희생을 치르며 후퇴했다.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 주민들은 피난을 서둘러, 흥남으로 모여들었다. '바람찬 흥남 부두'에는 짐 보따리와 가족, 어린아이들을 등에 업은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인산인해였다.
이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작전이 흥남철수 작전이다. 이 작전 지휘관이 제10군단장 알먼드(Edward Almond) 소장이었다. 1950년 12월 11-24일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약 10만 5천 명의 군병력과 피난민 10만 명, 전투장비와 군수물자를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작전이었다.
흥남에서 마지막으로 북한 피난민을 싣고 나온 배가 미국 국적의 길이 196m, 폭 20m에 불과한 7,600톤급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였다.
미군 대령이 배의 선장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에게 이 화물선에 태울 수 있는 여유 정원이 얼마냐고 물었을 때, 12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배에 1만 4천명이 탑승했다. 아기와 어린아이가 4천명이었고, 부상자는 17명이었다.
12월 22일 밤 9시 30분부터 승선하기 시작하여 23일 낮 11시 10분에 승선이 완료되어 승선 시간만 13시간 40분이었다. 이보다 더한 콩나물 시루는 없었을 것이다. 라루 선장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 같았다"고 썼다.
23일 오후 흥남부두를 출발했다. 중공군 보병부대가 6km 앞까지 진출했을 때였다. 적군이 설치한 4천개의 기뢰를 피해 영하 20-40도를 넘나드는 혹한과 폭설을 견디며, 24일 낮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부산은 이미 피난민의 도시로 변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 다시 거제도로 향했다. 기적의 항해였다. 의사도 약도 없었고 음식도 없어 먹지 못하고 마시지도 못했으며, 추위에 굶주리고 화장실조차 이용하기 어려웠으나,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3일간 800km를 항해하여 거제도 장승포항에 입항했다.
항해 중 다섯 아이가 태어났다. 피난민들이 완전히 하선한 후 라루 선장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항해 중 5명 탄생, 사망자 없음. 14,005명 무사히 상륙."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은 이 배에는 상당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탑승했고, 교회 단위로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사례가 후일 순장로교회를 형성한 함경남도 함주 덕천교회 이계실(李桂實, 1889-1971) 목사를 주축으로 한 5개처 교회 성도 130여명이었다.
이들은 거제도에서 같이 생활하던 중 서울에 안착하였고, 순장로교회를 형성하게 된다. 함흥을 탈출한 이들은 공산주의의 핍박을 피해 자유를 찾아온 이들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해상탈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해상탈출이자, 지고한 인도주의 정신이 가져온 기적이었다.
다섯째, 한미방위조약의 체결은 또 하나의 기적을 이루었다.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오늘까지 '한미 동맹'의 든든한 조약이 되었고 우리의 자유를 지키는 안전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의 체결은 이승만 대통령의 끈기와 뚝심, 그리고 외교력으로 얻어낸 결실이었다. 조약이란 상호수혜 가능성 혹은 잠재적 가능성이 있을 때 체결되지만, 우리가 미국의 방위에 기여할 가능성은 전무해 보이는 상황에서 체결된 것은 주익종의 표현처럼 '새우와 고래의 동맹'이라고 할 수 있다.
1951년 3월 이후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내외로부터 휴전에 대한 요구가 대두되었다. 특히 1952년 8월 20일 김일성은 중공의 저우언라이를 통해 스탈린에게 휴전을 제안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탈린은 미국을 한반도 문제에 묶어두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사망하고, 전쟁 종결을 공약했던 아이젠하워가 1953년 1월 20일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휴전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했다. 만일 중공군이 압록강 이남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휴전하면 국군이 단독으로라도 싸울 것이라고 엄포했다. 안전보장 없는 휴전을 반대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클라크 유엔 사령관을 통해 이승만을 설득했는데, 이승만은 휴전 수락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휴전 성립 전 조약 체결은 불가하다고 단언했다.
휴전 협상의 최대의 난제가 포로송환 문제였는데,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전격적으로 반공 포로 2만 7천여 명의 석방을 통해 미국을 압박했고, 결국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받았다.
휴전협정은 진척되어 7월 27일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간 계속되던 전쟁은 종식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8월 8일 가조인되었고, 10월 1일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이로써 북한의 남침과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주한미군의 주둔을 공식화하였다.
오늘과 같은 좌파 정권의 안보관과 대북정책을 고려할 때,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 평화와 안전을 위한 든든한 초석이 아닐 수 없다. 주한 미군은 국방 안보의 중요한 자신이기도 하지만, 군사적 가치는 30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 조약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그렇다면 이 조약 체결을 기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맺는 말
6.25 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의 역사에서도 기적 같은 일들이 적지 않았다. 아직도 무궁무진한 6.25의 비사들이 드러나면 그 기적 같은 일들은 더 많을 것이다. 기적과 같은 일들은 따지고 보면 애국가 가사처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고, 하나님의 역사 간섭이었을 것이다.
정치학자 이정식 박사는 『21세기에 다시 보는 해방후사』에서 6.25 전쟁은 비극이었지만, 대한민국 발전을 이루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변화의 결정적 변수로 두 가지를 꼽았는데, 첫째가 군사적 팽창이고 다른 한 가지가 한미 관계의 변화라고 보았다.
특히 전쟁 중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바탕으로 한미 관계가 긴밀해져,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내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아픈 현실에서, 그나마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상규 교수(백석대학교)
월드뷰 2020년 6월호에 게재된 글을 기고자가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