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6일 네덜란드의 Martinus Tiny Muskens 주교가 TV 방영에서 "만약 네덜란드의 천주교인들이 하나님을 모슬렘들이 알라라고 부르는 것처럼 부를 수가 있다면 기독교인과 모슬렘 사이의 대립을 완화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되려면 약 100년 내지 200년이 걸릴것이다" 고 덧붙였다.

알라는 매우 아름다운 하나님을 위한 말이다. 우리 모두 지금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르면 안될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을 할까? 그것은 우리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논쟁과 입씨름 너머에 계신다.

화란 정치인 Geert Wilders 가 코란을 힛들러(히틀러)의 '나의 투쟁' 과 같은 책으로 간주하고 금지를 제안하고, 전-모슬렘인 Ehsan Jami가 무하메트를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를 비유한 시점이라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을 과도히 염려해서 그런 발언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나 의도적이었다는 비평은 이슬람 측에서 보인 반응에서 엿볼 수가 있었다.

미국 이슬람 연맹은 그의 발언은 모슬렘,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똑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종교 간의 아주 유익한 이해의 길을 열어준다 .이름은 믿음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언어는 사람이 만든 제한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덕적인 규범을 어떻게 행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환영했다.

Tiny Muskens는 30년 전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일한 선교사였다. ‘나는 거기에서 8년동안 여호와 대신에 전능하신 하나님 알라(Allah Almighty God) 라고 부르면서 미사나 성찬식을 거행해 왔다' 고 밝히면서 '네덜란드의 교회들도 이미 알라라고 부르면서 기도하고 있는 인도네시아기독교 교회를 본받아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사실 아랍 기독교인이나 모슬렘들은 하나님과 알라라는 말을 서로 병용하며 쓰고 있다.

그러나 이 논란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알라라는 어원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성서의 하나님과 코란의 알라와 동일한 하나님인가 하는 대 논쟁이다. 이것은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심각한 충돌이다.

이슬람 경전 코란에서 믿지 아니하는 성서의 백성에게 최후의 경고를 하는 메디나의 계시 9장과 유일신론을 강하게 짧게 주장하는 메카의 계시 112장은 성서의 하나님과 완전히 다른 알라를 말하고 있다.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러 가로되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성자와 성부도 두지 않으셨으며 그분과 대등한 것 세상에 없노라. (수라 112:1-4)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이것이 그들의 입으로 주장 하는 말이라 이는 이전에 불신한 자들의 말과 유사하니 하나님이 그들을 욕되게 하사 그들은 진실에서 멀리 현혹되어 있더라. (수라9: 30)

알라는 아들이 없다. 그러므로 알라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무려 60번 이상이나 아버지라고 하나님은 부른다. 이슬람은 하나님이 마리아와 동거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받아 드릴 수가 없다. 맞는 주장이다. 알라에는 인간 여인의 부인이 없다. 그렇다. 신에게는 부인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육체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신앙은 이슬람의 신앙이며 동시에 기독교 신앙이다.

Allahu akbar! Allahu akbar! (알라는 위대하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선교지에 가면 진지하게 모슬렘들과 토론한다. '하나님이 전지하심과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고 있음을 믿는가?' 하는 물음을 가지고 토론을 시작했다. 그들은 사랑의 문제에서 넘어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함을 믿는 모슬렘은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이 이처럼 하나님의 소중한 대상인 줄 알지 못하고 있고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분명히 다른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체의 문제가 나오면 자꾸 에로스적인 육신이란 생각을 고집하고 있었다. 결국 모슬렘 선교는 사랑의 문제이었다.

코란 5장은 분명히 기독교의 삼위 일체에 대하여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셋 중의 하나라 말하는 그들은 분명 불신자라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신이 없거늘 만일 그들이 말한 것을 단념치 않는다면 그들 불신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벌이 가해지리라 (수라 5:73) 이렇게 간단히 삼위의 하나님을 부인해 버린다.

만약 모슬렘들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10: 30)'와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라는 말씀 뜻을 알았다면 기절을 했거나 입에 자갈을 물고 대들 것이다.

10년 전에 터키에 갔을 때 한국 참전 용사를 만나 즐겁게 담화하다가 종교 이야기가 나와 모슬렘 선교에 아무것도 몰라던 때 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기었다. 그는 드디어 안색이 변하다가 드디어 상을 뒤 업고 욕설을 하며 나갔다.

지금도 파키스탄에는 코란을 잘못 취급해도 불경죄로 취급, 여차하면 기독교인을 잡아 가두는 판에 하나님을 알라라 부르는 모슬렘을 아들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하는 교회에 초청하여 예배 드리자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왜 이 주교는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그들이 과연 예수를 하나님으로 받아드릴까?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대접으로 하루에 5번식 기도를 해야 할 것 같다.

요즈음 세대에 모슬렘의 과감한 선교와 테러 때문에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rnism)의 사조 때문에 이 주교처럼 CAT Scan을 하면 뇌에 조그만(이 주교의 Middle name이 tiny이다) 종양이 있을 법하다. 차라리 모슬렘의 임만이라고 불려도 좋을 너무 많은 사제들이 겁 없이 하는 소리들을 대중 매체로 듣는다.

‘알라는 매우 아름다운 하나님을 위한 말이다. 우리 모두 지금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르면 안될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을 하실까’

과연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 않으실까?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며 영화스럽게 하시기를 질투까지 하면서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시고’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 준 기도이다. 십계명에도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자체가 공존을 위한 타 종교와의 대화라는 명목에서, 인간화를 부르짖은 사회 복음의 외침 속에서 얼마나 힘을 받고 있는 지 모른다.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드러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다(겔36: 23)' 고 외친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모슬렘 선교를 해야 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어디든지 죽을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선교사로 십자가에서 돌아 갔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다.

열린문 선교회 문승만(510.797.99475 odms@sbcglob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