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청교도"라는 이름은 1564년에 쓰여진 문서에 담겨있는데, "새로이 개혁된 엘리자베스 여왕의 교회 내에서, 중백의 가운을 착용하기를 거부하고, 상하구조의 교회제도에 대항하며, 교회의 강령에 서명을 거부했던 열정적인 개신교인들"을 의미하는데, 처음에는 매우 경멸하는 단어로 쓰였다.
청교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영국 교회가 보다 더 성경을 따르는 철저한 종교개혁을 원했기 때문이다. 1558년 엘리자베스 여왕 (재위 1558-1603)이 매튜 파커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고, 중도적인 종교정책 (Elizabethan Religious Settlement)을 시행해나가려고 의회를 통과한 새 법령을 발표했다. 이를 거부한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성경에 따라서 가장 거룩하고 순수한 교회를 세우고자 열망했던 사람들이었다. 영국 종교개혁의 시기에 국가 전체가 하나로 통일된 성공회 체제가 되었으나,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예식과 예배와 조직이 강압적으로 유지되어나가자 이를 거부하고 보다 철저한 신앙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을 일컬어서 청교도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청교도는 유럽에서 일어난 제 2차 종교개혁 운동에서 나온 용어로서,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순수한 신앙운동을 일컫는 단어이다.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16세기 초반의 종교개혁은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 북부지역과 츠빙글리의 취리히 지역, 요한 칼빈이 영향을 발휘했던 제네바 등에서 정착되어 나갔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도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영향력이 확산되어나갔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잔재들이 남아있었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교회지도자들의 안일한 대처 속에서 정치권력이 교회를 사실상 지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난 2천 년 간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순수하고 철저했던 성도들과 교회를 찾아본다면 바로 "청교도"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 사상은 초기 지도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최고로 종합되었고, 가장 탁월한 문서로 정리되어졌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꽃을 피운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요나단 에드워즈를 마지막으로 꼽는다. 그리고 난 후, 후기 청교도들은 변화된 정치상황과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 속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버렸다.
청교도들은 초기부터 수난과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의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쫒겨나고, 감옥에 갇히고, 외국으로 피신을 가야만 했고, 심지어 수없이 많은 피를 흘리고 쓰러져 간 분들도 많았다. 공통의 영적인 체험을 공유하고, 신앙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긴밀한 관계성을 맺어나갔다.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의 신앙을 계승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과 성도들이었는데, 19세기에는 토머스 챨머스와 챨스 스펄존, 20세기에 마틴 로이드 존스, 그리고 최근에는 제임스 패커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정통 기독교 교회의 핵심 구성원들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금도 청교도라는 이름을 계승하고 있는 신학교육기관들, 교회들, 출판사들, 그리고 가장 순수한 기독교를 추구하는 성도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있다. 그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지속해서 청교도 신앙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참되고 순수한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다.
청교도들의 시대는 개인적으로나 국가 사회적으로 정말로 어둡고 힘든 시대였다. 청교도 사상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던 시대를 살면서 최고의 신학자로 평가를 받는 존 오웬(1616-1683)의 경우를 보면, 그의 자녀 열 명이 모두 다 유아기에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딸 한 명도 아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중보건 체계가 열악하던 시대였기에,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영국 국가교회 체제를 거부하는 비서명파 목회자들에게 가해진 정치적인 박해와 고난은 그야말로 대립된 사회에서 언제 죽음을 언제 불러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청교도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좁은 길, 좁은 문을 향해서 나아가는 험난한 여정이다.
청교도(Puritans)는 "엄밀한 자들"(precisionists) 혹은 "더욱 더 순수하고 거룩한 교회를 건설하고자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경건한 자들"이다. 청교도주의(puritanism)는 16세기와 17세기에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근간으로 하여 잉글랜드에서 독특하게 발전시킨 열렬하고 "뜨거운 개신교"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들은 단순히 교회를 더욱 더 성경적으로 청결하게 하고자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당시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여 하나의 새로운 흐름과 운동을 전개했다. 주교, 감독직은 로마 가톨릭의 잔재로 생각했고, 제네바와 같은 장로교회 체제로 대치하고자 했으며, 순결하고도 경건한 삶을 실천하고자 했다. 모든 청교도가 다 장로교회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장로교인들은 청교도였다.
청교도들은 기독교 교회를 보다 철저하게 개혁하여 주교의 체제 아래서가 아니라, 제네바와 같이 장로들에 의해서 치리되면서 성경적인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영국 왕정체제를 고수하려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녀의 독특한 종교정책을 막무가내로 끌어나가자, 상하 구조로 연결되어진 교회 체제를 거부하였다. 청교도에는 장로교회 제도를 추구하려는 그룹과 회중교회, 침례교회, 급진적인 그룹 등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초기 1559년에 영국교회는 교회의 정치체제로서 국왕을 최고 권위자로 설정하는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발표하여 로마 가톨릭과 같이 상하구조로 된 주교 중심이었고, 예배형식과 교회의 목회는 1563년에 나온 "통일령"에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요소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의 신학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엘리자베스의 영국교회는 유럽의 개신교회들과 유사했지만, 주교제도를 자신의 통치기반으로 삼았기에 사실은 장로교회, 회중교회, 독립교회 체제를 완강하게 탄압했다. 1570년대와 1580년대에 등장한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제시하는 통일된 규칙들에 대해서 "절반의 개혁"으로 평가하고, 성직자 예복착용과 예배시간에 하는 의식적인 요소들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로 많은 성직자들이 영국 국교회체제에서 추방을 당하거나, 감옥에 던져졌다.
메리 여왕의 통치시대에 (1553-1558) 유럽으로 피난을 갔던 성직자들이 돌아와서 성직자 가운을 입는 것에 반대하면서 저항에 부딪혔다. 이들은 영국 성공회의 예식과 예배형태가 여전히 로마 가톨릭에서 시행하던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음에 일제히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영국교회가 절반정도만 개혁된 교회라고 판단하였다. 메리 여왕의 잔혹한 핍박으로 토마스 크랜머, 리들리, 에드윈 샌디스, 휴 라티머, 존 브래드포드 등 4백 여 명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사형을 당했기에, 청교도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고 교회의 개혁을 진일보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