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비안교도들! 그들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후에 사도행전적 공동체를 이루었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그들의 지상과제로 받아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앞을 다투어 선교지로 나갔다. 하나의 교회 같은 그들 형제단의 희생적 선교활동은 잠자던 개신교 성도들의 가슴을 흔들어 근대선교의 횃불을 타오르게 했다.
그들에 의해 요한 웨슬리의 가슴이 뜨거워짐으로 온 영국에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고 윌리엄 캐리의 가슴에 선교의 불을 붙게 했다. 그들은 근대선교의 아버지라 부르는 윌리엄 캐리 보다 60년 전에 개신교 선교의 불길을 일으키고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선교의 모델을 제시했던 사도행전적인 공동체였다.
모라비안 교도들이란?
보헤미아의 개혁자 '얀 후스(Jan Hus,1372-1415)'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신교들로 박해를 피해 여러 나라로 흩어졌으나 일부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남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오고 있었다. 독일 귀족 진젠돌프가 그들을 자신이 구입한 땅에 거주하도록 허락하자 베델스돌프로 모여와 진젠돌프의 지도하에 공동체를 이룬 무리들로서 모라비아에서 왔다고 모라비안 교도 또는 모라비안 형제단이라 불렀다.
얀 후스는 카톨릭 시대에 순교한 종교개혁자다. 그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현재의 체코에 해당하는 보헤미아에서 종교개혁의 서막을 열었다. "누구든지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며, 성경만이 우리가 의지하고 믿어야할 대상이다. 모든 성도들은 모국어로 된 성경을 읽어야 한다. 교황과 성직자의 권위는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살 때에만 인정된다."고 선포하다가 화형 당했던 순교자다.
진젠돌프(1700-1760)
독일 귀족 출신으로 할레대학에 입학해서 할레를 유럽의 대표적인 경건주의 요람으로 만들었던 프랑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할레대학 시절 진젠돌프는 하나님에 대해 열심히 연구했고 철저한 헌신의 생활을 위해 '겨자씨 모임'을 만들어 성경읽기운동을 일으키고 외국선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 후에 가족들의 권유에 따라 루터가 강의 했고 종교개혁의 요람이었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 유럽 여행 중에 뒤셀도르프 성당에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고통 받으시는 장면을 그린 특별한 그림과 그 아래 쓰여진 "나는 너를 위하여 피 흘려 내 몸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 라는 글을 읽고 그의 일생을 주님께 드리기로 헌신하고 목사가 되었다.
1722년 그의 나이 22세 때 베델스돌프에 넓은 땅을 구입해서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파하다가 박해를 받으며 떠돌아다니던 모라비안들의 소식을 듣고 그들을 자신의 땅에 거주하게 함으로 피난처를 제공한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교회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곳을 주님의 보호(Lord's Watch)라는 뜻을 가진 헤른후트(Herrnhut) 라고 불렀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형제단 회원이었지만 다른 교파 출신들도 있어서 그들은 교리적으로 하나 되지 못했고 마음이 일치되지 못했다. 진젠돌프는 그들이 은혜와 진리로 하나가 되고 대속적이고 희생적인 주님의 죽으심에 관심을 갖게 함으로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주장을 접고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다. 그는 모라비안 공동체가 사도행전의 교회처럼 온 교회가 성령 안에서 가족처럼 서로 하나 되어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장시키는 전투적인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고 그렇게 이끌었다.
모라비안 교회에 임하신 오순절
1722년 공동체가 시작되어 당시 모라비안 교회는 200 여명이 그곳에 정착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성령님을 사모하며 하루에 3회씩 소그룹으로 모였다. 1727년 7월 16일, 7월 22일, 8월 5일 기도 중에 성령께서 점점 더 강하게 임하심으로 점점 뜨겁게 눈물의 기도와 회개의 역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8월 10일에는 감당할 수 없는 능력에 압도되어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찬송하며 눈물로 간구했다.
8월 13일에는 온 회중이 성찬식을 행했는데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가 온 회중에게 임함으로 온 성도들이 이전에 없었던 큰 눈물의 회개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모두에게 큰 기쁨과 행복이 임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날의 감격을 나누었고 진젠돌프는 그 날을 "헤른후트의 오순절"이라고 불렀다.
이 부흥은 어른들 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도 임하여 8월 18일에는 어린이들까지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불길이 충만하게 일어났다.
헤른후트의 부흥의 결과
1, 8월13일 부터 26일까지 24명의 남자와 24명의 여자들이 하루 한 시간씩 24사간 연쇄기도에 헌신한다. 얼마 후에 77명이 연쇄기도에 참여하게 되는데 문헌에 의하면 세계선교를 위한 연쇄기도가 100년간 계속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기도가 계속되면서 성도들은 서로 하나 되어 사랑했고, 말씀 사모운동이 일어났으며, 예배를 사모하여 하루에 3회씩 예배를 드렸고, 교회는 새로운 찬양의 물결과 은혜가 넘쳐 나게 되었다.
2, 헤른후트의 오순절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린 그들은 복음 들고 세계로 나가기 시작했다. 1732년 부터 1760년까지 28년간 모라비안 교회는 226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이는 종교개혁 이후 모든 개신교가 파송했던 수 보다 많은 수였다. 모라비안 선교회는 1930년까지 3000명의 전임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개신교 근대선교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교우 12명 중의 1명의 비율로 복음 들고 선교지로 나갔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선교지망자가 너무 많아 제비를 뽑아서 나가기도 했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서인도제도의 노예들을 선교하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여러 면에서 선교의 모범을 보였는데 대부분이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였고, 선교지의 언어를 배워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으며, 그들과 함께 그들처럼 살면서 삶과 희생으로 복음을 전했다.
3, 모라비안들은 요한 웨슬레를 변화시켰다.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가 조지아주로 부터 초청을 받아 선교사로 대서양을 항해하는 배를 탔을 때 배가 금방 파선될 것 같은 심한 폭풍을 만나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때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평화롭게 찬송하는 무리들을 발견했는데 그들이 바로 미국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나는 모라비안들이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요한 웨슬리는 모라비안 지도자들과 교제를 나누게 되었고, 선교에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 모라비안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뜨거움을 체험한 후에 변화를 받고 영국을 뒤흔드는 전도자로 쓰임 받는다.
4, 그들의 선교소식에 근대선교의 아버지라 부르는 윌리엄 캐리가 크게 도전 받았다. 윌리엄 케리는 영국에서 발간되는 선교잡지에서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기사들을 접하고 감동과 도전을 크게 받고 "보라, 모라비안교도들이 하는 것을! 우리들은 그들을 따를 수 없다. 그들은 주님께 복종하고 세상에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우리보다 앞서 행하고 있다." 고 침례교도들에게 도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분부를 순종하기 위해 100여 년간 24시간 연쇄기도를 이어감으로 잠자던 개신교 선교에 불을 지피고 모범을 제시했던 모라비안 형제단 같은 교회와 선교회가 말세를 당한 오늘날 더욱 많이 나오기를 기도하며...
부흥을 사모하는 작은 종 강순영(JAMA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