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부활절 예배는 여느 때와는 달리 쓸쓸한 분위기이다. COVID-19로 인해 교회 예배와 축제, 행사가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부활절은 성탄절 버금가는 기독교인의 명절 아닌가. 명절 치고는 너무나 조용하고 한적하다. 그래도 부활절에 대한 신앙이 환경에 따라 변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COVID-19로 인한 적막함과 암울함이 부활신앙의 진정한 의미와 열매를 품을 수 있다고 본다.
"예수 다시 사셨네"라는 신앙인의 외침은 부활절 예배와 행사, 그리고 평상시에도 늘 고백되어지는 신앙의 머릿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신앙인에게 '세상을 이김'과 소망이 있음을 얼마나 믿어왔던가. 어떤 공포 속에서도 감사와 환의, 평안을 갖는다는 이 믿음은 기독교인만이 소유할 수 있는 보화이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도 다시 살리심을 믿기 때문이다.
필자는 부활신앙이 어둠과 암울함 속에서 그 진가가 더욱 빛날 것이라고 믿는다. 기독교인은 세상의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면서도, 오히려 진동 가운데 진동치 않는 삶을 보인다. 세상이 진동할 수록 그 믿음의 힘의 모습이 더욱 드러나기 때문이다. 촛불이 어두울수록 그 빛이 더 발하듯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때로 신앙인의 환경이 흔들려야만 한다(히12:27). 결국 하나님이 그 분의 나라를 확고히 세우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현주소에 편안 대신 불편함을, 질서 대신 무질서를, 행복 대신 불행을 도구로 삼으실 수 있다.
만사형통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은 아니다. 만사가 가끔 뒤틀려야 한다. 이 세상의 삶이 순조롭거나 재앙이 속히 멈추는 것만이 신앙인의 기도가 되서는 안된다. 신앙인이 진동 속에서 영적 삶을 깊이 터득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부활신앙은 얼마나 고귀하면서 소망있는 믿음인가.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신앙인의 부활신앙은 미래지향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약 미래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그것은 부활신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에 있어서 부분부정은 전체부정을 뜻하기 때문이다.
부활신앙은 현재의 삶에 더 중요한 요소로 남는다. 이미 구원받았듯이 우리는 지금 부활된 삶을 살아야 한다. 부활신앙을 제대로 경험한 신앙인은 현재를 미래처럼 살 수 있다. 부활된 경험과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그 변화된 인성과 행동으로 안일하고 편안 자리가 아니라, 고난과 힘든 장소를 자원한다. 왜냐하면 그 삶의 자리가 부활의 열매를 더 빛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거듭남은 혼돈과 환난 속에서 그 힘을 더욱 발휘하기에 체질적으로 높고 잘 되는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 부활신앙이란 "우리 몸도 부활할 것"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된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데에 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졌다면,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라. 요즘 같은 재앙의 시대에도 의연한 삶의 태도를 보이라. 남들이 출구만 찾고 있을 때 터널 속에서 그 의미와 삶의 진정성을 보이라. 문제해결만 찾으려 하지말고 문제 속에서 이미 해답이 있음을 인지하라. 왜냐하면 신앙인은 미래지향적이면서도 현재의 완성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온대로 어느 경우이든 자족하며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요셉이 애굽의 감옥에 있으면서도 형통했다고 전한다(창39:23).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이란 단지 행복하고 잘 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형통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부활절을 기념하며 감사하는가. 그래서 신앙인 모두는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될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이미 부활된 것처럼 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