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닥터 두리틀(Doctor Dolittle)>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동물들과만 소통하고 있는 주인공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로다주)가 여왕을 치료할 수 있는 '신비의 섬'을 찾아 동물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코미디 판타지 가족 영화'입니다. 8일 개봉해 예매율 1위를 기록하며 11일까지 60만 관객을 모은 이 영화는 스티븐 개건 감독과 '로다주', 톰 홀랜드(지프), 라미 말렉(치치), 안토니오 반데라스(라술리), 마리옹 꼬띠아르(투투) 등이 목소리로 출연합니다. 원작 소설 <닥터 두리틀> 시리즈는 1967년과 1998년 이미 제작됐습니다.
동물을 다스림: 서구 문화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
<닥터 두리틀>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친근한 관계를 중시하는 서구적 동물 이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동양 문화에도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이 있지만, 대개는 동물을 친근하게 여기기보다 '상서롭게' 여기는 숭배의 심정이 짙게 배어 있다.
한국에서 동물을 삶의 친숙한 동반자로 여기는 서구적 반려동물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고대와 중세 초기까지는 서구 각지에도 동물을 신적 존재자 혹은 반신적 존재자로 숭배하는 전통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남유럽에는 그리스-로마 신화, 북유럽에는 게르만 신화로 동물에 신성을 부여하는 전통이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됐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서구 정신문화를 지배하면서, 동물은 숭배 혹은 경외의 대상이 아닌 공생과 다스림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는 성경의 창세기에 수록된 창조 기사(창 1:26-28)와 에덴동산 기사(창 2:19-20), 그리고 이사야서에 기록된 메시야 강림 예언(사 11:6-8)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인간을 관리자로, 동물을 피관리자로 지정한 성경의 가르침이 과도하게 인간중심적이고 위계적이라서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 원인으로 작용해 왔다는 생태철학자들의 비판이 점점 더 호응을 얻는 추세다.
그렇더라도 지적 측면과 기술문명 측면에서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인간이 동물을 다스리도록 정한 성경의 질서는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도 여전하게 반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1894년 발간된 러디야드 키플링의 소설 <정글북>을 보면, 인간 아기 모글리가 처음에는 정글 속 늑대 무리에게 양육되는 입장이지만, 청년으로 자라면서 정글의 모든 동물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고 결국 자신을 동물과 구별해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화 <닥터 두리틀>의 원작소설 <두리틀 선생> 시리즈(1920-1952) 역시 인간 두리틀 박사가 동물들을 치료하고 모험을 주도하는 관리자 역할을 담당한다. 불과 3년 전 개봉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를 보더라도, 옥자라는 슈퍼돼지의 양육과 구원은 인간 친구 미자에 의해 수행된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은 서구 문화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위계 관계 설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여기에 더해 성경은 인간이 가진 이런 다스림의 권한이 동물과의 완전한 언어적 소통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것 역시 서구 문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다.
오늘날 전 세계를 아우르는 문화 제국 디즈니의 초석이 된 캐릭터 미키 마우스를 생각해 보라. 인간과 동물, 혹은 동물과 동물 사이의 완벽한 언어적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상이 없었다면, 오늘날 디즈니가 누리고 있는 성세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물과의 대화: 성경적 이상향 속 인간과 동물의 소통
물론 인간과 동물이, 그리고 동물과 동물이 언어로 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단지 성경으로부터만 나온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각종 신화나 우화(대표적으로 이솝 우화) 속에도 동물이 언어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대개 신화나 우화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대화, 혹은 동물과 동물 사이의 대화는 그리 유쾌하고 평화로운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 대개 망가진 창조 질서를 반영하듯, 투쟁적이고 기만적이고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최근까지도 우화는 그래 왔다. 1945년에 발간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성경 기사는 인간과 동물 간 관계의 근원적 성격으로 조화와 화목을 강조한다. 물론 마귀의 조종을 받은 뱀의 유혹이나, 발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억울하게 매를 맞고 죽을 뻔한 나귀의 사례에서, 인간과 동물의 대화는 이방 신화나 우화와 마찬가지로 기만적이거나 비극적인 결말에 이른다.
하지만 아담과 여자의 타락 이전 에덴 동산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전적으로 화목한 소통의 관계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인간이 짐승을 죽여 번제물로 드리거나 먹이를 삼는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듯하다.
그리고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이 관계가 파괴된 이후에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과거 완벽하게 화목했던 인간-동물 관계의 회복을 묘사하고 있다.
메시야의 강림 후 온전한 창조질서가 회복된 세계에서는 저주를 받았던 짐승의 일족인 독사들조차 인간과 화목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선포하고 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8)".
인간과 동물의 완벽한 화목에 대한 예언은 서구 문화 속 이상향에 대한 이미지를 부여해 왔다. 이는 디즈니를 비롯해 수많은 서구 애니메이션과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
디즈니 작품들의 경우 은근한 반기독교 정서와 친오컬트 정서가 깔려 있지만, 인간에게 지극히 우호적이고 친근할 뿐 아니라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동물 캐릭터를 등장시킨다는 점은 분명 기독교적 동물 이해에 영향을 받은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영화 <닥터 두리틀>은 디즈니 작품은 아니지만(유니버설 픽처스 제작), 디즈니의 동물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와 동일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작품이다.
원작소설에서 닥터 두리틀은 탁월한 언어적 재능을 기반으로 앵무새 폴리네시아를 통해 동물의 언어를 배운다. 폴리네시아는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앵무새로 매우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작중에서는 영국 국왕 찰스 2세를 본 적 있다고 말하는데, 따지자면 대략 1651년부터 영국에 있었고, 그 이전에 태어난 셈이 된다.
두리틀 박사는 원래 의사였으나, 앵무새 폴리네시아를 만나 동물들의 언어를 익힌 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동물을 치료하고, 새로 만나는 동물들과 그들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
세계 각지의 동물을 돌보기 위해 동물들과 언어로 소통하고 새로운 동물들을 알아보는 일, 이는 성경의 창세기에 나온 아담에게 부여된 임무와 매우 유사하다.
아담은 에덴 동산과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것(식물과 동물을 포함)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을 맡았고(창 2:15), 각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도 담당했다(창 2:19-20).
결국 <닥터 두리틀>이 동물들과 협력하며 종횡무진하는 모험의 세계는 성경의 창세기에서 묘사한 화목한 낙원이라는 이상향을 아동문학적으로 재창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