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권력 이동과 함께, 막대한 자본 마련을 위해
국가와 수단 가리지 않은 추악한 경로와 진실 폭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무솔리니에 침묵 이유도
교황청의 돈과 권력의 역사
제랄드 포스너 | 명노을 역 | 밀알서원 | 880쪽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건을 파헤친 탐사 전문기자가, 이번에는 바티칸 로마 교황청의 정치적 음모와 내부 비밀을 다뤘다. <교황청의 돈과 권력의 역사(God's Bankers: A History of Money and Power at the Vatican)>를 통해서다.
변호사 출신의 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수년에 걸친 집요한 추적과 광범위한 인터뷰를 통해, 교황청의 권력 이동과 함께 막대한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와 수단을 가리지 않은 추악한 경로와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라는 저자는 500여년 전 르네상스 시대 막강한 권력으로 교황청까지 손에 쥐었던 보르지아 가문에서 현 교황 프란치스코까지, 돈의 흐름을 추적하고자 했다.
책은 1982년 런던에서 자살로 위장한 살인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런던 블랙프라이어스 다리 아래, 줄에 매달려 있던 시체의 신원은 62세의 밀라노 암브로시아노 은행 회장 로베르토 칼비로 밝혀졌다.
일주일 동안 행방불명 상태였던 그는 죽기 며칠 전 작성한 편지에서 "동유럽에서 남미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와 싸우는데 있어 나는 바티칸을 위한 전략적 선두주자였다"며 "앞으로 닥쳐올 일들은 상상 이상의 재앙을 야기해 가톨릭 교회가 중대한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교황과 즉각 알현할 수 있기를 호소했다. 교황을 위한 '중대한 서류'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나 당시 부검 결과 타살인지 자살인지 밝혀낼 수 없었고, 유가족은 16년 후 다시 부검을 요청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부족했다. 2002년 보관 실수로 잃어버렸던 증거가 추가됐고, 3년간의 조사 끝에 이탈리아 검찰은 5명을 기소했다. 그러나 2년 후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무죄 평결을 받았고, 2010년과 2011년 항소 법원에서도 무죄가 선언됐다.
저자는 "칼비의 죽음은 바티칸 내부의 권력과 금력의 회랑에 있는 조명등을 바라보지 않고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며 "돈과 관련된 가톨릭 교회의 분쟁과 불안의 역사를 조사해야만 칼비의 죽음에 개입된 세력을 드러낼 수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칼비의 죽음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유래하는 오늘날의 스캔들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자, 바티칸을 개혁하려는 교황 프란치스코가 당면한 여러 도전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라며 "바티칸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추문 중심에는 돈이 있다"고 일갈한다.
저자는 이후 교황청의 역사를 훑어가면서 권력과 돈의 냄새로 얼룩진 이면을 드러낸다. "바티칸 밖의 사람들은 교황청을 단순히 교황령을 관리하는 행정조직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라돈(Ladon)과 같은 음모와 미혹의 조직을 최소화해서 바라본 단순한 견해다. 실상은 독신 남성들이 함께 살고 일하면서 동시에 교황의 영향력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싸웠던 거대 조직이었다."
특히 교황청은 비오 11세가 1929년 체결한 라테란 조약(Lateran Pacts)을 통해 이탈리아 파시즘 독재자 무솔리니와 사실상 '동맹' 관계를 맺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히틀러와 나치에 침묵했던 과정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제8장 '침묵 정책'에 따르면, 바티칸 국무원장 파첼리는 1939년 교황 비오 12세로 등극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유대인 대량 학살뿐 아니라 로마 내 유대인 추방에 대해서도 침묵했는데, 이를 반대할 경우 히틀러가 보복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독일이 패할 경우 소련을 통해 공산주의가 득세할 것도 우려했다.
"비오의 공개적 침묵은 연합국의 침묵보다 결코 더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티칸은 연합국과는 다르게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고유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의 수장으로서 어떠한 서방 정부보다 큰 도덕적 권위를 행사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나치 독일과 피점령 국가 내에서도 수백만 명의 열렬한 경배자를 보유했었다.
여러 독실한 가톨릭 신자는 자신의 믿음을 유지했다. 동시에 그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일했고 대량 학살에 관련된 제3제국의 관료기구를 운영했다. 어떤 사제들은 파시스트 정치와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다. 교황은 자신의 수동적인 태도 탓에 그들의 그런 모순을 바로잡아주지 못했다."
비오 12세는 전임 교황들처럼, 가톨릭을 보호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삼았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피점령국 교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신자들이 교황의 칙령에 순종해야 했던 시절, 만일 비오가 가톨릭 신자가 유대인 학살에 일조하는 것이 도덕적 죄라는 선언을 명백하게 했다면, 그것은 히틀러의 최종 해결책인 유대인 전멸 정책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비오는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상징적으로도 파문하지 않았으며, 바티칸의 금서 목록에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을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교황을 침묵하게 했던 또 다른 이유는 반유대주의라는 교회의 지독스러운 역사에서 기인했다. 반유대주의는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했다. 그 종교적 편향은 가톨릭 신학과 예배의 핵심이었다. 수세기 동안 가톨릭 전통은 히틀러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의 씨를 뿌리도록 도왔다."
'침묵'의 다른 이유는 돈이었다. 바티칸은 당시 군수 회사에 투자했고, 무솔리니 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비슷한 동기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때도 작용했다. 교황의 도덕적 의무는 이윤 추구 앞에서 잊혀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비오의 침묵은 제3제국(나치)과의 복잡한 사업상 이해관계가 보호되는 데 일조했고, 이는 바티칸에게 엄청난 이득을 줬다.
이와 관련, 교황청은 비오 12세 재위 기간 문서에 대해, 올 3월 2일 공개하기로 한 상태다. 이 날은 비오 12세의 즉위 81주년이다. 교황 문서는 선종(죽음) 70년 후 공개하는 것이 관례로 당초 8년 후에나 볼 수 있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는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라며 '봉인 해제' 계획을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연구자들은 비오 12세의 기록과 역사의 어두운 시기에 이뤄진 은밀하지만 활발한 외교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과연 일각의 주장대로 비오 12세가 수도원과 수녀원 등 교회 시설을 통해 비밀리에 나치의 박해를 피한 유대인들을 숨기는데 역할을 했을지 여부가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책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추기경 조지 베르골리오가 1,300년 만에 비유럽계 교황으로 콘클라베에서 선출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인민의 교황'이자 '락스타'로 불리는 그가 '검은 돈'의 온상이었던 바티칸 은행 '개혁'을 시작하리라는 기대이다.
실제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은 저자가 책을 내놓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올해 8월에도 회계감사직을 외부에 개방했고, 10월에는 금융 부정 의혹이 있는 성직자 등 5명을 직무정지시켰다. "바티칸은행의 개혁과 투명성, 현대화를 향한 움직임은 베네딕토 16세 밑에서 시작됐으나, 프란치스코는 이를 최우선 사항으로 만들었다."
저자는 세간에 떠도는 바티칸 지하의 나치 금괴, 교황 살해설,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 사제들의 보호를 받는 조직폭력배 등 잘못된 정보의 덩어리들을 밝히 드러내고, 가톨릭 교회의 돈과 권력 욕구를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