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주 은퇴목사회는 지난 18일 정기 모임을 갖고 월례 예배와 휴대폰 사용에 대한 특강 시간을 가졌다. 이날 설교한 본지 원 일 목사는 "믿음이란"(누가복음 22:31-31)제목으로 설교와 특강을 전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하는 설교 요약
설교에서 "우리 가 "믿음이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믿음을 가졌다 혹은 믿음을 소유했다고" 표현하는 것이냐고 물으면서, 한글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네 믿음이 대로 그리고 네 믿음이"라고 번역된 한글 성경의 의미가 믿음을 한번 소유하면, 우리가 그 믿음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믿음을 우리의 의지대로 사용 할 수 있다 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영어성경은 "그 믿음에서 변질되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번역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믿음에 대해서 믿음이란? 믿음은 끊임없이 행하고(행동하고) 움직이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하는 믿음을 행함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말하였고, 그 행함은 주님과 끊임없이 동행하는 것 이라 정의할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결론적으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요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그 믿음을 잃지 않는다, 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말하였다, 여기서 행함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일/사역"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일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 지 않는 사람은 그 믿음이 일하지 않으므로 고로 죽은 믿음"이라는 의미이며, 주님의 일을 하는 자는 주님 이 함께하시므로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여러 번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그 대표적인 것들이 첫째, 달란트 비유에서, 둘째,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셋째, 열 므나 비유에서, 넷째, 무익한 종 비유, 등에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의 사람들을 부르고 꼭 일을 맡기시고 그리고 꼭 일을 시키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이 땅에 는 아직도 잃어버린 주님의 백성들을 찾으라고 주님께서 먼저 부르신 자들에게 부탁하신 일, 그것이 바로 빚진 자의 비유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행동하는 믿음/ 즉 일하는 믿음은 어떡해서 생겨나는 건가요? 오늘 본문에서 인간 베드로에게 생겨난 전체 일들을 함축하고 요약해서 정리해보면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 님과 동행하면서 때로는 주님에게서 칭찬도 들었고, 때로는 엄청 충격적인 말도 들었고, 급기야 주님을 모른 다고 저주하면서 부인(배교)하고 자기가 하던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단은 끊임없이 베드로를 예수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은 욥기(구약)에서도 볼 수 있는데, 욥이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하늘에서는 엄청난 일이 진행 되었는데, 그것은 사단이 욥을 시험하고자 하나님에게 허락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도 충분히 더 많은 일과 배교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남지 않는 것)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계시록 12:12)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디모데전서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미혹한다는 의미는 "길을 못 찾아 방황하다, 길을 벗어나다, 헤매다, 잘못 인도받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자기의 때가 가까운 줄 알고 사람들을 미혹(잘못 인도하기)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준비한 계략이 성 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곡해해서)해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아담의 때도 그러했고, 예 수님을 시험할 때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유사하게,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아담을 공격했고, 예수 님을 공격을 공격했고,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아멘하고 저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아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한 가지 명료하고 정확합니다.
창세기 2장17절에 "정녕 죽으리라"에서 죽음이라는 히브리단어, "무트"가 두 번 사용되어 명령을 어길 시에 는 반드시, 절대로 죽이겠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와 약속이 포함되어 있지만, 창세기 3:3절에 "죽을까 하노라"에서 하노라 라는 단어 "펜"을 사용한 사단이 하와에게 말한 내용의 의미는 "동산에 선악을 아는 나 무가 있으니 너희가 그 나무를 만지거나 실과를 먹으므로 목숨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말했던 것 입니다. 이렇게 성경 해석을 하면 안 넘어갈 사람이 적고,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을 불분명하게 흐리거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가르치면, 그렇게 전한 사람이 받을 형벌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요, 들은 사람 도 들을 때는 귀가 즐거울 줄 모르나, 그것이 쓴 뿌리가 되어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그러나 영 혼을 깨우는 말씀은 당시는 좀 고통스러워도 혹 내 영혼이 깨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거나, 혹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어 그를 구원하고 그 가정을 구원할 기회를 얻는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택하신 자들이라 할지라도 육신의 자랑과 욕심, 돈, 명예, 성적인 것, 무법, 교만, 남을 업신여기는 것, 가난 한자를 보고 못 본체하는 것, 알고도 도와주지 않는 것, 성경말씀으로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것, 자기 배만 채우는 것, 아첨하는 것, 성경을 바로 가르치지 않은 것, 수군거리는 것,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영혼이 깨어 나지 못 하게하는 큰 방해거리이자,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만드는 큰 영적인 걸림돌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자세히 조사한다/면밀하게 조 사한다는 뜻으로, 고운체에 밀가루나 콩가루를 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사단이 그러한 체를 가지고 우 리를 치면, 그 좁은 틈을 무사히 빠져나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단이 이렇게 촘촘한 잣대로 우리를 저울에 달아 하나님께 아뢰면 열심히 신앙 생활해도 부족한데, 오히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하기를 예수의 공로로 천국 가지 우리의 공로로 천국 가냐고 말들 하지만, 천국은 예수님의 공로로 가지만 그렇게 예수님의 공로로 천국에 가는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조심 없고, 분별력 없이, 살다가 천국에 오라고는 성경 어느 곳에도 기록한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노라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악하고, 더 추악하고, 더 간사하고, 더 간교 삶을 산다면 사단이 주님에게 간청한 것처럼, 계속 저 베드로만 감싸시겠습니까? 라고 말할 것 입니다. 어떤 분들은 속으로 "주님이 감당만할 시험밖에 안 주신다고" 성경에서 말했다고, 그러나 한글성경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라는 말씀을 다른 사본에는 "믿음이 강한(주님을 신뢰하는, 확신하는)자 이외는 시험이 없나니, 라고 해석하고 있어서, 믿음이 강한지 하나님을 잘 믿었던 자, 주님을 잘 따르고자 했던지, 욥도 그렇고 오늘 본문에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언제 우리가 욥과 베드로처럼 주님을 저렇게 섬겨볼라고 생각이나 해보았습니까? 그렇게 보면 이 해석이 더 옳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돌이킨 후에야 형제를 굳게 하라고, 그 말씀은 마치 욥기 23:10절 의 말씀처럼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 같이 나오리라"라는 말 씀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3:19절에 보면 중생의 단계가 나오는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돌이키는 것입니다. 오늘 보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돌이킨 후에"라는 말씀 은 사도행전에 3장19절에 나오는 말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영어 로 번역하면 "너희가 회개하고 그리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라고 해석되는데 회개가 먼저이고, 회개한 사람은 돌이켜 변화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돌이키되, 조금이 아니라 완전히 돌아서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믿는다고 믿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는 돌이켜 열매를 맺는 삶을 주님이 요 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3장에 세례요한의 외침도 마찬가지 이었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요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