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붕(天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부모님의 돌아가심은 천붕입니다. 아버지께서 천국에 가신 것을 알고, 나는 마음으로 확인하고 논리적으로 정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도미를 위해 공항으로 가는 길에, 집의 지붕이 날아간 것 같은 어려운 마음을 겪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지붕이셨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도 큰 슬픔이지만, 아들이나 딸이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는 부모에게 얼마나 더 큰 슬픔이 될까요? 부모님이 천국에 가시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자식이 부모 먼저 죽는 것은 불효이고 부모의 큰 슬픔입니다. 한국에서 교분을 나누던 장로님이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친구 목사가 “하나님의 큰 위로를 빕니다”하며 간곡히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내가 받을 어떤 것도 나의 아들을 잃은 슬픔을 보상하여 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아 그렇구나. 어떤 선물도 부모에게 자식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구나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이충무공과 같은 성웅도, 정약용과 같은 대학자도 아들을 잃은 마음을 담담하게 시로 적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충무공은 <난중일기>에서 이처럼 절절히 외칩니다. “내가 살고 네가 죽다니.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하거늘. 이 어찌 하늘의 이치에 어긋난 일이 있단 말인가!”
정약용은 9남매 자녀 중에서 6남매를 잃었습니다. 그중의 한 아들이 죽어가는 비극을 체험하며,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짓습니다. “마마로 죽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등창으로 죽다니 억울하지 않으리요.... 지난번 모진 고통 네가 겪고 있었을 때 나는 한창 질탕하게 놀고 있었지.... 내 마음 빗나갔으니 벌 받아 마땅하리. 이러고서 어떻게 징벌을 면할 건가.”
시인 김현승도 <눈물>이라는 시에서 늦게 둔 아이를 잃은 고통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아비들은 자식을 마음에 묻고 뒤돌아 눈물을 흘립니다만, 부부 중에서 자녀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가 있으니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저항합니다. 어머니는 다른 것은 포기할 수 있지만 자식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어머니는 차라리 자식을 살릴 사람을 위하여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 때문에 노예가 됩니다. 어머니는 자식이라면 비장해지고 결연해집니다. 어린 외아들을 잃은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찾아 저항합니다. 그리고는 아들을 살립니다. 그 장소에서 수백 년 후,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