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명세가 좀 있는 한 침례교 목회자가 정치적인 견해로 인터넷상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적이 있다. 상대는 목회자들이 아니었다. 논쟁 중에 급기야 한 상대자가 "(그것은) 성직자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하자 이 목회자는 말하기를 "... 개념적으로 목사는 성직자가 아닙니다.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목사는 신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라고 반박을 했다.
근래 이와 같이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다", "목사도 평신도이다"는 주장들이 목회자가 아닌 일부 기독교 지식인들을 통해, 혹은 위와 같은 목회자 자신의 입을 통해 공공연하게 유포되고 있는데, 그릇된 생각이다.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다", "목사도 평신도이다"는 주장을 접할 때 맞닥뜨리는 성직 무효성의 근거는 대개 '만인사제설'일 것이다.
1. 오해: '만인사제설' vs '만인사제성'
이러한 주장들은 중세교회와 현대교회를 엮어 '중세식 성직자=현대식 목사'라는 등식으로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를 무력화하는 시도로 귀결되는데, 대다수 선량한 기독교인이 이런 거짓에 넘어가는 이유는 이 '만인사제' 혹은 '만인제사장'론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가장 큰 오해는 '만인제사장'이라는 말을 "만인이 제사장이다!"는 말로 오인하는 데 있다. 본래 '만인제사장'이라는 표제의 정확한 명칭은 'Priestertum aller Gläubigen(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다.
"모든 사람이 사제이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의 사제성"이란 표현이 정확한 말이다. 독일어인 -tum(영어로는 -hood)은 그 기질과 속성을 뜻하는 어미로, "사제이다"라는 명제로서가 아니라 '사제성(priester-tum)'에 관한 논제로서의 표현인 것이다.
마르틴 루터의 개혁이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원의 표지로 시작되었다면, 그의 개혁신학의 궁극적 방점은 바로 이 '만인사제성'의 안착에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그 표지가 완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2. 만인사제성의 실행
"모든 믿는 사람의 사제성"이라는 논제의 주 공격 대상이 되었던 중세교회의 '사제성'은 크게 세 가지로 구현되고 있었다.
1) 죄사함의 권세
2) 성사(성례) 집전의 권세
3) 세속직과의 구별된 권세
특별히 1항과 3항은 2항을 통해 실현되었는데,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에 아무나 참여할 수 없음은 물론 찬양조차 아무나 부를 수 없었다.
여기서 중점적으로 분쇄한 것은 바로 1항으로, 죄를 사하는 중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독점적 권세로 봉인함으로써, 성찬은 권세가 아닌 나눔으로, 성직자의 직무는 예배, 선포, 교육의 주무로 전환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실천신학을 도출한 원리가 바로 "모든 믿는 사람의 사제성(Priestertum aller Gläubigen)"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제성(Priestertum)'은 대체 어디서 도출된 것이냐.
3. 만인사제성의 기원
그것은 그리스도의 '(大)사제성'과 맞물려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성은 히브리서에서 밝혀주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막연하게 얻은(하늘에서 떨어진, 혹은 땅에서 솟은) 어떤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약과 율법 규정에 따르고 있음을 밝힌다.
(사제성을)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아론의 반차'를 따르고 있음이 그것이다. 수많은 이스라엘인 중 어찌하여 아론이 사제가 되었을까? 모세 형이라서? 아니다. 그것은 '부름을 받았기(καλούμενος, 히 5:4)'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성(Priestertum)'이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부르심으로 됐다는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인데, 이는 이 사제성의 '분여'에 대단히 중요한 원천이자 기원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에 가능한 일인 까닭이다.
-우리가 집사로서 직무에 임하는 것은 년수가 차니까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 가능한 원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장로로서 임직할 때에도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만 가능한 원리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 가운데 누군가 목사로서 임할 때에도, 가장 궁극적 표징은 바로 '부르심'이다.
4. 만인사제성의 적용
집사직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부르심이 없은즉 사제성(Priestertum)도 결여된 것이라 하겠다. 그런 집사직의 유통은 중세 교회의 매관매직에 다름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로가 목사와 동등하다면, 그는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어야 하는 것이다.
장로교의 장로가 스스로를 '목사로서의 장로'로 임직하고 있든, 혹은 장로교의 목사가 스스로를 '장로로서의 목사'로 임직하고 있든, 혹은 감리교의 장로가 스스로를 장로교식 장로가 되고 싶어하든, 혹은 감리교의 목사가 스스로를 부제들과 차별된 목사라고 규정하든,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목사는 목사로, 장로는 장로로, 집사는 집사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집사나 장로가 목사와 동질성을 획득하려면, 그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으면 된다. 가장 최악인 것은 목사로 부르심을 받지도 않은 자들이(혹은 목사로서의 부르심에 추호도 응할 생각이 없는 자들이) 목회를 하는 경우일 것이다. 이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무책임한 일이다.
나는 목사가 아닌 사람이 설교도 잘하고 목양도 훌륭하게 잘 돌보면서 사회관계망 인터넷상에서 와인을 즐겨 마시는 모습을 올리곤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와인 마시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무책임하게 직제를 더럽히는 짓에 대한 정죄이다.
이런 사람은 언제든 그 일을 그만두어도 자신에게 흔적이 남지 않지만, 목사가 그 일을 그만두고 나면 그 낙인을 몸에 지니게 돼 있다. 이것이 목사만이 갖는 특별한 흔적, 스티그마(στίγμα)이다.
사람들은 루터가 마치 모든 기독교인이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한 사제(Every Christian is his own priest)'라고 주장한 것처럼 그릇되게 강조하곤 한다. 그러나 루터의 교회론 중 일부인 이 '만인사제성' 원리는 기독교인이 '타인을 위한 사제(Every Christian is a priest to others)'라는 보편의 정체성에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만인을 위한) 사제로서 타인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고 인도하기 위하여,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가치가 부여된다는 의미로서의 만인사제성(the Universal Priesthood)을 지닌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만인사제성'은 적어도 '민주주의'와의 등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제도를 민주주의로 오해하는 자들은 거의가 자신의 이 특별한 지위를 저 위 높은 사제성으로까지 끌어 올리는 기회로 노력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저 위 높은 곳의 순결함을 지향하는 사제들까지 자신과 같은 낮고 저열한 영적 수준 아래로 끌어내리기 위해 이 진리를 도용한다.
이 시대 '목사'라는 성직이 여기에 훼손당하고 있는 것이다.
▲엘 그레꼬의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을 확대한 모습. 사제 복장을 한 어거스틴과 왼쪽 부제 스데반. |
끝으로 엘 그레꼬의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이란 그림을 하나 소개하고 마칠까 한다.
중세의 사제 서열이 어찌나 막강한지, 사제의 법복을 입고 고깔을 쓴 것은 어거스틴인 반면, 옆에서 부제로 섬기는 자는 초대교회의 순교자 스데반으로 그려놓고 있다. 돌에 맞아죽은 스데반조차 중세교회의 골격을 짠 어거스틴의 지위만 못한 중세 교회 성직의 계급을 엿볼 수 있다.
현대의 성직 파괴자들은, 마치 스데반의 신성한 지위조차 부제의 지위로 끌어내리는 저들만큼이나 중세적이다. 모두가 자신을 가리켜 왕 같은 사제라기에 하는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