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안에서 인본주의 개혁과 성령 개혁은 겉모습은 똑같아 보여서 구별이 어렵습니다. 그러면 인본주의 개혁과 성령의 개혁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그러나 구별이 가능합니다. 먼저는 이것이 쇼맨십인가? 진실인가? 을 보면 압니다. 또한 율법으로 적용한 것이냐? 성령으로 적용한 것이냐? 을 보면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인본주의 개혁은 억지이기 때문에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억지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먼저 내 세우는 것이 윤리와 도덕, 정의와 심판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사람 중심을 내 세웁니다. 그러나 인간 힘으로 이루려 하면 억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은 시간 앞에 굴복하게 됩니다.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개혁은 생명의 역사이기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공급하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율법 화 시키는데 명수입니다. 그래서 복음도 율법 화시킵니다. 예수님도 율법 화시킵니다. 항상 오직 예수, 오직 복음을 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붙든 율법의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도, 복음도 율법 화 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면 성령과 사람으로 충만해집니다.
더 이상 부족이 없습니다. 생명이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생수가 흘러넘치게 됩니다. 아무 것도 안했는데 주변이 밝아집니다. 변화된 사람이 생깁니다. 이것이 진짜 개혁입니다. 개혁을 한다면서 어두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도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아이가 꼴찌를 하고 나서 하는 말이 나는 다른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답니다, 이 애의 꼴찌로 다른 애들이 한등씩 올라갔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아이가 하는 말이 감동입니다. 아버지는 제가 항상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라 하셨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꼴찌하면 좌절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기를 먼저 보기보다는 남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같은 사람이 잘 살면, 누구도 쓰러지지 않을 거라는 사명감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닉 부이치치 같은 태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가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름 사람이 그의 꿋꿋함에 용기를 얻습니다. 이것이 생명이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밝게 만드는 길입니다.
[김병규 칼럼]인본주의 개혁과 성령의 개혁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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