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대를 공감을 중시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면 공감은 다 옳은가? 물론 공감이 옳은 것도 있습니다. 살인을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게 살인은 절대 불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옳지 않은 공감도 있습니다. 성경 메시지를 사람들의 공감에 맞추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윤리와 도덕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예수로 포장된 윤리이지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납득과 이해와 공감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감은 내 수준을 받아들이는 것뿐, 말씀에 대한 신뢰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사람이 납득하고 이해하며 공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100세에 얻은 아들을 모리아 산에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해와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 십자가와 부활 개념을 알게 됩니다. 아들 죽이는 아버지의 심정과 아들 대신 숫양의 죽임을 통해 대속의 개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삭을 번제로 죽이라는 모순을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라는 말씀으로 해결을 받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말씀을 붙들고 도약하는 것입니다. 오래 믿어도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납득과 이해와 공감에 매달려서 좁은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납득과 이해와 공감을 벗어나 신앙의 도약이 있으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무능과 실패와 탈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경험으로 볼 때 납득과 이해와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신앙의 도약이 삶의 도약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기적을 맛보지 못하도록 현상과 본질을 착각하게 합니다. 탕자는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한 현상입니다. 그러다 아버지에겐 양식과 풍족한 품꾼이 많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마귀는 돼지우리 인생을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단순 현상을 본질이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이 본질임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현상이 깨지고, 본질의 회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돼지우리가 나의 본질이라며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