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 머니와 수쿠크 이후, 이슬람은 '난민' 문제로 또 다시 한국 사회에서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교회가 난민을 품어야 한다'는 주장과 '테러와 범죄 우려가 있다'며 경계하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아랍어와 아랍 문화 및 종교를 연구하고 있는 이나빌 선교사가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와 이슬람의 이집트 침략>이라는 책을 펴냈다. 저자는 초대교회부터 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꽃피웠던 이집트가 어떻게 이슬람화됐는지, 그 감춰졌던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1,400여년 전 쓰였던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의 발견을 통해서다.
바쁜 사역 가운데, 저자는 왜 1,400여년 전 고대 문서를 연구해야 했을까. 다음은 8월 중순 만난 이 선교사와의 인터뷰.
-책에서 소개하신 '니끼우 요한'은 누구인가요.
"'니끼우'는 이집트의 고대 지명입니다. 아랍이 침범하던 당시 델타 지역에 존재했던 도시였습니다. '니끼우 요한'이란 니끼우에 살았던 요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지금부터 1,400년 전 아랍 군대가 이집트를 침략할 때 이집트에서 살았던 실존 인물로, 대략 625년에 태어나 700년 사망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아랍이 이집트 침략을 시작할 때가 639년 겨울이니, 대략 14살 이후 아랍 침략의 실상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 후 성인이 되어 자신이 목격한 내용을 직접 기록했고, 그것이 바로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입니다."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나요.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는 아랍 군대가 이집트를 침범한 역사만 기록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창조부터 시작해 아랍의 이집트 정복까지, 이집트의 역사를 시대 순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122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파라오의 역사들과 이집트에 대한 외세의 침입 등 수많은 역사적 내용들이 수록돼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랍 군대가 이집트를 침범한 역사는 맨 마지막 부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아랍 역사학자들 가운데는 아랍 침략의 역사를 기록한 경우가 없는지요.
"있습니다. 알 와끼디, 알 발라드리, 이븐 압둘 하캄, 앗따바리 등 여러 무슬림 역사학자들이 아랍 침략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8세기 후반 혹은 9세기 사람들입니다. 즉 사건 발생 이후 1.5세기 혹은 2세기 이후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역사 기록은 모두 이슬람 편향적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아랍의 입장에서 그들이 저지른 악행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이슬람을 미화한 기록입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이 이집트에 들어옴으로써 이집트가 개화되었다'는 등의 서술입니다.
이집트에 얼마나 찬란한 파라오 문명과 그레코 로만 문명이 있었습니까? 이슬람이 이집트에 들어와서 한 일은 그 찬란한 고대 문화를 파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내용들을 감추고 왜곡된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400년 전의 기록인데, 어떻게 오늘까지 전래되었나요.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는 처음에 콥트어 혹은 그리스어로 기록됐습니다. 콥트어와 그리스어가 병행됐다고도 합니다. 그 뒤 이 내용이 아랍어로 번역되고, 아랍어로 번역된 것이 1602년 에티오피아어로 번역됐습니다.
그 에티오피아 사본이 19세기에 영국 원정대에 의해 발견돼 1883년 프랑스어로 번역됐고, 1916년 영어로 번역됐습니다. 그리고 1948년에는 아랍어로 재번역됐습니다. 현재 이 연대기의 에티오피아 사본이 영국과 프랑스 박물관에 보관돼 있습니다. 영어 번역본은 인터넷에서 쉽게 열람할 수 있습니다. "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걸로 아는데, 연대기를 처음 발견하였을 때 어떤 심정이셨나요.
"감춰진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한국인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그것도 1,400년 전의 기록이라는 데서 중요성을 직감했습니다. 특히 이집트에 대한 이슬람 침략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면에서 제게는 블랙홀과 같았습니다. 영어와 프랑스어와 아랍어로는 연대기가 존재하는데, 한국 사회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의외였고요.
그래서 번역에 들어갔고, 이 외에도 이집트의 이슬람화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책을 내게 됐습니다."
-아랍 군대가 이집트에 들어오는 과정은 어떠했나요. 그것이 기존의 이슬람에서 말하는 내용과 어떻게 다른가요.
"아랍 군대가 이집트에 들어오는 과정은 분명 '침략'이었습니다. 이슬람은 그것을 '개화 혹은 계몽'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거짓이고 왜곡입니다.
실제 전투가 이집트 전국에서 있었고, 많은 일반 백성들이 잔인하게 살해됐으며, 전국 중요 성채에서 수개월간 항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에서 쉽게 발견되는 내용들입니다.
오늘날 무슬림은 아랍의 정복 과정이 평화적이라고 하고, 심지어 당시 콥트 기독교인들이 아랍 군대를 구원자로 여기고 환영했다고 합니다. 이집트 무슬림도 그렇게 말하고 한국의 친이슬람 학자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당시 이집트가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심한 박해를 받은 나머지, 아랍 군대와 협력해 동로마 군인들을 이집트에서 쫓아내었다고까지 주장합니다.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를 보면, 이집트 콥트 교회와 교인들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바빌론 성채 항복 전날, 동로마 군인들이 콥트 죄수들의 손을 자르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박해가 사실이라도, 콥트 교인들이 아랍 군대를 환영하거나 그들과 협력하여 동로마 군인들을 쫓아냈다는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객관적 표현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박해로 인해 이집트 사람들이 아랍 군대에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당시 이집트 군대가 아랍 군대에 쉽게 패한 원인은 무엇인가요.
"당시 이집트 군대의 상황을 보면, 전국에 편재한 군대 조직이 중앙집권적 조직이 아니라, 4-5개 부대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 군대 조직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지방의 반란을 사전에 방지한다는 이유로 군대 조직을 지방분권화 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외부의 침입에 일사분란하게 대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이집트 군대의 구성원을 보면, 군대의 중간 지휘관 이상은 모두 동로마 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를 방어하는 군대이지만, 그들의 정신 세계는 이집트 군인이 아니라 동로마 군대였습니다. 따라서 악착같이 싸울 이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이집트 사람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집트가 워낙 많은 외세의 침입에 노출되다 보니, 국민들의 외세에 대한 관심이나 주인의식이 약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집트의 종교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집트는 인구의 90%가 무슬림인 이슬람 국가입니다. 이집트의 헌법 2조에 '이슬람이 국가의 종교이며, 이슬람 샤리아법이 법률의 주원천이다'고 돼 있습니다. 샤리아법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무슬림 이외의 나머지 10%는 콥트 기독교인입니다. (콥트 교회의 통계로는 15-25%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헌법에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의 예배의 자유는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종교의 자유라고 할 수 있는 전도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보장돼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 노방 전도를 할 수 없고, 무함마드나 꾸란을 비판하는 경우 '종교모독법'에 저촉되어 감옥에 가는 실정입니다. 기존 예배당에서 예배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새롭게 예배당을 짓는 것은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이집트는 원래 기독교 국가였는데, 어떻게 지금처럼 이슬람 국가가 되었을까요.
"이집트 이슬람화의 시초는 아랍 군대의 침략에 대한 항전이 패배로 끝났을 때부터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시가 641년에 항복하는데, 그 이후 점차 이슬람화되어 갑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이슬람화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항복 이후 이슬람 칼리프 시대, 우마이야 왕조 시대, 압바스 왕조 시대, 파티마 왕조 시대 등을 지나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많아집니다. 그래서 파티마 왕조 시대(10세기)에는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콥트 기독교인이었고, 맘룩 왕조를 지나면서 인구의 2/3 이상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는 말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말인데, 그들의 개종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먼저 오늘날 무슬림은 이집트에 강제 개종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콥트인들이 자발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집트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 말은 이슬람의 포교를 위해 만들어낸 완전한 거짓말이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개종의 원인은 복합적이겠으나,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기독교인들이 내는 '지즈야'라는 세금이었고, 두 번째는 점증하는 '박해'였습니다."
-'지즈야'란 무엇인가요.
"이슬람이 정복한 땅에 사는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들이 죽음을 면한 대가로 이슬람 통치자에게 내는 세금을 말합니다.
이슬람은 그들이 정복한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셋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슬람을 선택하든,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의 경우) 지즈야를 지불하든,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요구 조건에서 지즈야는 죽음 대신 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꾸란에서도 기독교인과 유대인들로부터 지즈야의 징수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굴복하여 수모를 느끼면서 지즈야를 지불할 때까지 하라(9:29)'. 이처럼 지즈야는 '굴복하여 수모를 느끼면서'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슬림은 이 지즈야를 '무슬림이 자카라는 세금을 내듯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이 국가에 정당하게 지불하는 세금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슬람 포교를 위한 거짓입니다."
-지즈야의 액수는 얼마였나요.
"이집트 콥트인들에게 부과된 지즈야는 1년에 금화 2디나였습니다.학자들 연구에 따르면, 당시 2디나는 일반 시민 연봉의 40%였다고 합니다. 1천만원을 연봉으로 받는다면, 4백만원을 이슬람 통치자에게 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온갖 수모를 느끼면서 말입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생업을 이어야 하는 가장의 입장에서, 그 액수가 엄청나게 무거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흉년이 들거나 홍수가 날 경우, 수입은 줄어들지만 지즈야는 2디나로 고정돼 있으니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콥트 기독교인들은 과중한 지즈야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도망가거나 수도원으로 도피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슬람 통치자들은 주민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만들게 하고,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검사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는 도망하다 발각된 사람들의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탄압이 있던 차에, 725년 기독교를 떠나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 지즈야를 징수하지 않는다는 법령이 내려집니다. 그러자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습니다. 2년 동안 2만 4천명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합니다."
-이슬람 통치자가 지즈야를 악착같이 강요했나요.
"이슬람 통치자의 최고 관심은 지즈야 징수와 수탈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 여러 부분에서 잔인하게 세금을 거두어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즈야를 지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녀들을 팔기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죽은 사람의 지즈야를 살아있는 사람에게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마을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이 있을 경우, 개종한 사람 숫자 만큼 지즈야를 적게 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슬람 통치자는 그 마을의 지즈야를 원래 액수 그대로 내도록 강요했습니다.
따라서 개종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남아 있는 콥트인들에게 지즈야의 부담이 커졌고, 그로 인해 개종의 대열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두 번째 요인인 박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조직적으로 진행됐고,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가 더해졌습니다. 이슬람 통치자들 개인에 따라 박해가 줄어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통치자들과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콥트 기독교인들을 2등 시민으로 차별하며 여러가지 종류의 핍박을 했습니다.
먼저 박해는 이슬람이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어떻게 보고 취급하는 가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이슬람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짐미'라고 불렀습니다. '짐미'는 이슬람의 통치 아래 하대받고 천대받는 2등 시민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구별되는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하고, 머리카락도 앞머리를 밀어야 하며, 허리에는 허리띠를 띠어야 했습니다. 무슬림은 말을 타고 자랑스럽게 여행하는 반면 기독교인은 말을 타는 것이 금지되고, 당나귀를 타야 했습니다. 무슬림이 길을 지나면 기독교인은 길을 비켜주어야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목에 십자가를 달거나 심지어 방울을 달아야 했습니다. 지즈야를 낼 때도 무슬림 관리는 앉아있고 기독교인은 서서 지불해야 했으며, 무슬림 관리는 기독교인의 뒷목을 치면서 '이 놈아 지즈야를 내어라'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둘째, 이슬람 통치자들의 박해가 컸습니다. 무슬림 통치자 가운데는 노골적으로 기독교인을 싫어해 그들에게 벌을 주고 투옥하며 개종을 강요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관직에서 쫓아내고, 집들을 파괴하며 불질렀습니다.
전국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살해와 탈취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습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거리들이 피로 가득했던 적이 많습니다. 교회 지도자인 교황을 투옥하고 교황의 수염을 뽑으면서, 개종을 강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한 내용이 저의 책에 기록돼 있습니다.
셋째, 이슬람으로 개종한 서민들의 박해였습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무슬림 숫자가 과반수가 넘고 그들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자, 그들 스스로 이웃의 콥트 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생활 가운데서 주위의 이웃으로부터 눈총과 따돌림과 욕설과 위협을 당했지요. 무슬림 이웃이 주위 기독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무슬림을 선동하고 관리에게 고자질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내용도 저의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친이슬람 학자들은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강제 개종'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집트가 이슬람화 되어 간 과정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모든 개종 과정이 콥트인들을 칼로 위협하며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그러니 개종하라'고 요구했던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콥트인들은 강제적이고 집요하게 착취한 지즈야의 과중함으로 인해, 그리고 통치자와 이웃 무슬림에 의해 일방적으로 당하는 박해와 차별이 증가함에 따라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평화적이고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강압과 탄압과 박해에 따른 비자발적인 개종인 것입니다."
-오늘날 친이슬람 학자들은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란 표현이 중세 유럽 교회가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란 구절이 꾸란이나 하디스에 직접 기록돼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령 중세 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 구절이 이슬람의 본질과 침략의 역사를 한 마디로 가장 잘 묘사한 경구라는 것입니다.
꾸란과 하디스에는 기독교인과 유대인들과의 지하드 전쟁을 명령한 구절이나 잔인한 살해의 구절들이 즐비합니다.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만 봐도, 개종을 위해 칼로 위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IS의 행동이나 세계 각지에서 터지는 테러 분자들의 소행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인 무슬림 형제단의 심벌을 찾아 보십시오. 그 심벌에 칼과 꾸란이 양쪽으로 배치돼 있음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의 본질적 모습은 바로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 틀림 없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