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는 불안함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1900년 부터만 보더라도, 일본의 지배를 받아와 나라를 잃어 불안했고, 북한과의 분단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불안 속에서 살았으며, 독재정권 아래에서 민주화를 꿈꾸며 항쟁과 투쟁으로 불안해했고, IMF를 통한 경제적인 불안,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침몰, 제천 화재사고 등 여러 위험과 공포, 불안을 끊임없이 겪어 왔다.
미국은 어떠한가? 9·11 이후로 각종 테러와 교내 총기사건을 뉴스로 접하며 살고 있다. 이렇게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반복되는 사건과 사고를 통해, 인간들에게 들어온 뿌리 깊은 불안과 안정감에 대한 욕구는 어쩌면 당연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많은 신앙인은 불안함을 느끼는 것 자체를 죄로 바라본다. 불안은 믿음이 약해졌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불안함을 ‘절대’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한다. 과연 그럴까?
에덴동산에는 불안이 없었다. 그곳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순수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그 형벌로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할 수 있는 평화는 깨졌다. 세상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분리로 인해 불완전한 곳이자, 두려움과 불안이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결국 천국에 가지 않는 이상, 우리는 세상에서 불안함이라는 불편함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종종 성경 읽기, 기도하기, 예배 참석, 봉사 등 종교적인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종교적인 열심’을 통해 불안을 씻어내거나,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 하기도 한다. 건강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진정성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지, 불안함을 감소시키기 위해 율법에 매인 신앙 행위를 하는지는 본인만 알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행동만으로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본인이 스스로 그 행위의 목적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종교 활동으로 인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신념과 그 시도는 그 행위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거나 또는 작은 실수를 통해 완벽성이 깨어지는 순간 더욱 큰 불안을 일으키게 된다.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저마다 각각 다르다. 분명한 것은 매우 불편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불안한 감정이 오래가면 우울감이 자리를 잡게 되거나, 무기력증이 생기기도 한다. 극도의 불안감은 불안장애로 연결되기도 하며, 공황장애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작은 불안함 역시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감정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문제 해결을 통해 불안함을 없애기보다, 상황을 피하고 묻어두어 불안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 문제를 통한 불안함은 언제든지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반대로 안수기도, 축사와 같은 경험을 통해 불안함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그 문제가 사라지길 바라는 행위일 뿐이다.
성경에는 이러한 자신의 연약함, 불안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첫째로 모세가 있다. 불안한 시대에 이스라엘의 민족성을 잃지 않은 자신 때문에 불안한 환경에 노출되어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애굽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고, 그러한 결단력으로 광야로 도망가서 살아야 했으나, 그의 확고한 정체성과 광야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40년 광야 길을 잘 이끌 수 있었다. 모세의 삶은 불안한 환경의 연속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환경을 모세를 사용하시는 축복의 기회로 삼으셨다.
요셉은 어떠한가? 형들에게 미움받고 노예로 팔려갔을 뿐 아니라, 주인의 오해로 인해 감옥생활까지 해야 했던 요셉은 주인의 집안 살림을 도맡아 꾸리고, 감옥 안에서 여러 죄인을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으로 인해 총리의 일까지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특별히 시편은 다윗의 고통, 슬픔, 절절한 마음을 담은 시구절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시편은 그에게 불안과 두려움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던 절규와 기도, 고백들로 가득하다. 다윗은 불안함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였다. 즐거울 때나 기쁠 때뿐 아니라, 슬플 때와 분노했을 때 등 모든 순간에 하나님과 함께했고, 하나님을 찾았다.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의 고백은 어떠한가? 욥은 불안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놓지 않았고, 세 친구와 엘리후와의 대화에서도, 아내의 저주 속에서도 결단코 하나님을 놓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상황을 축소하거나 감추지 않았고, 괜찮은 척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복을 더하셨다.
성경에는 두려움, 걱정에 관한 많은 성경 구절이 있다. 그중 마태복음 6장 25~27절에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공중의 새와 들에 백합화도 먹이고 키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다. 이는 종종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시니 걱정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것이라는 정죄의 무기로 사용되고는 한다. 하지만 불안은 하나님을 찾고, 그 상황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한다는 초대의 뜻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사람, 장소, 불특정한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불안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8)을 고백하고, 불안을 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두려운 상황, 불안한 문제와 함께 이겨낼 힘과 지혜도 함께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 불안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더욱 건강한 평화, 참된 평화, 하나님과 상호관계를 쌓아나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불안한 마음과 그 마음을 대하는 나의 태도, 나의 신앙과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확인하고, 싸울 때 우리는 백전백승하는 승리의 용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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