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의 과제 네 번째 주제로 '새로운 현실'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피터 드러커는 그의 책 '매니지먼트'에서 기업이 직면하는 모든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잘못된 기업 이론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성과가 나지 않은 기업은 '기업 이론'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기업을 지배하고 있는 생산적인 일 하기, 근로자의 목표 성취 관점에서 의식 관리는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피터 드러커가 제시한 '새로운 현실'을 통해 살펴보자
"일에 생산성을 부여하고 근로자의 목표를 성취하게 하는 것은 중요한 경영의 과업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사회가 두 세기 전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때보다 노동과 노동력 면에서 훨씬 큰 변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업무와 생산에 관한 분석 및 통합, 통제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접근방식을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업무 구조 및 업무 관계, 경제적 보상 및 권한 관계의 구조에 대해, 그리고 근로자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일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원가 중심점'과 '문제'로 직원을 바라보는 '인사관리'에서 직원에 대한 리더십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매니지먼트'에서-
새로운 현실
'일과 근로', '일과 근로자'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피고용자 사회', 지식근로자로의 이동은 지식근로자에 대한 경영으로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지식근로자의 생산성이란 무엇인가? 지식근로의 목표 달성은 무엇인가?
'일(Work)'이라는 단어의 뜻만큼 모호하고 감정과 관련성이 많은 단어도 찾기 힘들다. '일과 놀이'가 있다. '놀이(play)'라는 말은 친근한 어감을 준다. 그러나 '놀이로 외과 수술을 행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예술가의 필생의 일'에서 일이라는 말은 높은 성취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니면 다른 경우에는 대단히 고된 일이나 힘든 일, 끔찍하게 지루한 일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처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일'이라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 말은 개인의 삶과 감정, 사회와 지위, 그리고 자기 자신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일과 근로는 대단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일은 비개인적이고 객관적인 의미이다. 일은 그 어떤 것도 경중을 따지거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담에도 '일에 귀천 없다'라는 말을 생각 해 본다. '일'과 '놀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그 오래된 질문에 대해 지금까지 만족스러운 답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과 놀이 모두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하지만 심리적, 사회적으로 볼 때 일과 놀이는 전혀 다르다. 진정한 차이점은 놀이와 달리 일은 비개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점이다. 일에서 나온 결과는 근로자 외부에 존재한다. 놀이의 목적은 근로자 내부에 존재하지만, 일의 목적은 근로자가 아니라 최종 재화나 서비스 사용자에게 존재한다. 다른 사람이 최종 재화나 서비스를 결정할 경우, 놀이를 행하는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놀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일이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체스는 놀이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체스는 일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일을 하는 것은 인간인 근로자이다. 일은 엄연히 인간만의 활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은 생리학이자 심리학이며, 사회이자 지역 사회이며, 인격이고, 경제학이고, 힘이다. 인간 관계에 대한 오래된 속담은 말한다. "손 하나만을 고용할 수는 없다. 손을 고용하면 그 사람 전체가 따라오게 마련이다." 따라서 일과 근로는 전혀 다른 규칙을 따라야 한다. 일은 사물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비개인적인 논리를 따른다. 하지만 근로는 인간의 영역이다. 자신만의 역할을 지닌다. 경영자는 일과 근로 모두를 관리해야 한다. 경영자는 일에 생산성을 부여해야 하며 근로를 행하는 근로자가 목표를 성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일과 근로자 모두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다. 4차 산업 혁명의 시기에 직면한 우리는 일과 근로자에게 발생할 변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급속한 변화가 될 것이다. 선진국을 포함한 현재 대부분의 노동인구는 직장에 고용되어 업무를 행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일하는 대신 조직에 소속되어 일한다. 우리 시회는 피고용자 사회로 변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특히 농부들은) 혼자 일하거나 소집단 속에서 일했다. 집을 떠나서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는 비율이 86%에 달한다. 우리 사회는 이미 고학력 사회에 진입하여 선호하는 직장과 선호하는 일을 바라는 열망이 어느 때보다도 커지고 있다. 물론 지식 노동에 반드시 고도의 기술이나 높은 학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고도의 정신적 능력이나 학문적 성취는 결코 지식 노동의 전제 조건이 되지 못한다. 서류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에게는 망치나 낫이 아니라 서류를 보고 처리할 수 있는 글자 해독 능력이 필요하며, 단순한 사물이 아닌 고차원적인 추상적 개념과 상징이 필요하다. 사람이 글자 해독 능력을 배우기 위해서는 경험이 아니라 정규 교육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정규 교육을 받고 기업에 취직한 지식 기반의 근로자의 비율이 60%를 넘어서고 있다. 그들에 대한 생산성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새로운 도전: 지식근로자에 대한 관리
지식근로와 지식근로자에 대한 관리는 '어제'가 아니라 '오늘과 내일'이다. 지식근로와 지식근로자에 대한 경영은 완전히 새로운 과업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해 육체노동자를 관리하는 일보다도 아는 바가 훨씬 적다. 따라서 이것은 보다 어려운 과업이 될 수밖에 없다. 기업과 지식근로자 사이에는 과학적 이론을 자처하는 상호 비난이나 의심, 분노에 대해 성립된 이론이 전혀 없다. 또한 이들 사이의 제한 사항이나 규칙, 규정으로 확고하게 정해진 통념도 없다. 따라서 지식근로자에 대한 관리는 올바른 정책과 관행을 개발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그것은 과거의 수정이 아니라 미래에, 문제가 아니라 기회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지식근로와 지식근로자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특출한 상상력과 예외적인 용기와 고차원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
경영자들은 육체노동과 육체노동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오랫동안 '두려움'이라는 무기를 사용해왔다. 경영자는 경제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 직업 안정에 대한 두려움, 회사 경비원이나 국가 경찰력에 대한 두려움을 무기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지식근로와 지식근로자를 관리하는 데에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가장 낮은 직급의 지식근로를 제외하면, 두려움은 지식근로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자기 동기 부여와 자기주도성만이 지식근로자에게 생산성을 부여할 수 있다. 무언가를 창조하려면 그는 자기 성취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선진 사회의 생산성, 즉 사회적 응집력은 점점 더 지식노동이 생산적이게 하고, 지식근로자가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것은 지식산업사회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가 될지 모른다. 지식노동에 대한 경영에서는 선례가 없다. 과거에는 소집단에 속한 몇몇 개인들이 독립적으로 지식노동을 수행했다.
지금은 경영이 행해지는 복잡하고 거대한 조직에 속한 사람이 지식노동을 수행한다. 지식근로자는 어제의 '지식 전문가'의 계승자가 절대 아니다. 그는 어제의 기술노동자의 후계자다. 따라서 지식근로자의 조직 내 지위와 역할, 공헌, 위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의해야 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지식노동의 생산성에 대해 측정은 고사하고 진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문서 담당이나 판매 여직원의 생산성은 정의와 측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제조기업 세일즈맨의 경우 생산성은 대단히 많은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세일즈맨의 생산성은 총판매량인가? 아니면 판매량 대비 공헌도인가? 그런데 이익 공헌 수준은 각각의 세일즈맨이 판매하는 제품 믹스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 아니면 세일즈맨의 생산성은 판매 담당 지역의 잠재력 수준에서 바라본 판매량인가?
기존의 고객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세일즈맨의 생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고숙련 육체노동자의 생산성을 정의하고 측정할 때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다. 설계 엔지니어나 서비스 엔지니어의 생산성은 정의하기가 훨씬 어렵다. 경영자의 생산성도 정의하거나 측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지식근로자의 목표 성취는 생산성보다도 정의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지식근로자 본인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무엇이 그에게 직업과 직무 성과, 사회적 지위, 자긍심에 대해 개인적 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조직과 사회에 대한 공헌 여부, 성과 달성 여부, 가치 제공 여부, 그리고 자기 발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지식근로자 본인밖에 없다.
하영목 교수(중앙대학교 경영경제대학, 국제물류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