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타락- 구원'을 헤겔(Hegel, 1770- 1831)의 '정(These) -반(Antithese)-합(Synthese)'의 변증법으로 설명하려 하나,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설명하기엔 충분치 않습니다.
헤겔 변증법의 합(Synthese)은 기껏 불완전한 '정(These)에로의 회귀'이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 전 상태(불완전한 These의 상태)로의 회복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에로의 진입입니다. 한 마디로 "처음보다 좋게 되는 경륜"입니다.
성경은 시종 그것을 강조합니다. 그 상징적인 예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처음 나온 포도주보다 예수님의 이적으로 만들어진 나중 포도주의 승(勝)함입니다(요 2:10).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구원받아 의롭게 된 상태가 처음 무죄의 상태보다 낫고, 무죄했을 때 아담의 생명보다 타락 후 구원 얻은 생명이 더 탁월하고, 죄에서 구속받아 하나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 된 지위가 아담의 자손된 것보다 비할 데 없이 탁월합니다.
◈죄의 구속으로 상실할 수 없는 영원한 의(義)를 입음
타락 전 무죄했을 때 아담의 의(義)는 영구한 의가 아니었습니다. 범죄로 언젠가 무너질 수 있는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의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행위언약을 지키는 한에서만 한시적으로 유지됐고(범죄 즉시 상실됨), 영구적이고 불변적인 의는 그에게 미증유(未曾有)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범죄 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우리의 의(義)는 다시는 변질되거나 무너질 수 없는 영구불변한 것입니다.
이 믿음의 의는 아담의 원의(原義)를 능가하는 전혀 다른 의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릴 수 있는, 완전한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만일 인간이 무죄한 상태를 유지했었다면 이 의의 요구가 필요없었을 터이고, 의의 요구가 없었다면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하나님 의(義)를 가질 수 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아예 타락할 수 없는 영구적 의를 부여하지 않고 타락 후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히 따라붙습니다.
그 대답은 한 마디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궁극의 송영(送榮)을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섭니다. 무죄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생명, 자연, 생존의 공급에 대해서도 송영을 드릴 수 있었겠지만 이것만으로는 하나님께 충분치 못했습니다.
죄로 지옥 갈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때만 궁극(窮極)의 송영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함이라(엡 1:6)",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4)."
◈죄의 구속으로 죽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얻음
무죄한 상태에서 아담이 가졌던 생명은, 죽음이 끼어들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이미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언약에 죽음이 함의된 데서도 드러납니다.
만일 인간의 생명이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었다면, 언약에 죽음이 시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상대로 언약을 맺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는지 아니면 10년 이후였는지 혹은 100년 후였는지는 확실히 몰라도, 결국 언약을 범하게 됐고 그 결과 그에게 죽음이 왔습니다(롬 5:12; 6:23, 엡 2:1).
이 역시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죽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인간에게 부여하지 않고 죽음 이후에 그렇게 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게 하나, 태초의 '자연인의 생명'과 죄로 죽은 인간을 살리는 '구속적 생명'의 차이를 이해할 때 그 의문은 풀립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릴 그리스도의 죽음을 불러왔고, 그의 죽음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태초의 무죄한 생명이 손상을 입을 수 있는 유한 된 생명이었다면, 그리스도 안의 구속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동일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부여되는 것은 구속받은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동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리스도를 믿는 자', 혹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永生)이 있다는 말 역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자에게는 그와 동일한 생명(永生)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죄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불러왔고, 그의 죽음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는데 그 옮겨진 생명이 영생입니다(요 5:24). 이 생명은 본래 아담이 가졌던 자연인의 생명과는 다른 영원한 생명으로, 그가 죽음에서 살림을 받는 과정에서 획득했습니다. 곧 죄의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에로의 살림이었습니다.
만일 인간에게 죄와 죽음이 없어 본래의 생명이 그대로 유지됐다면, 그들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영생에로의 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죄의 구속으로 새롭게 형성된 관계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과 불화하지 않았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이 없어 피조물과 창조주 관계 이상으로 확장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단지 죽음 없는 무죄한 피조물로 남았었을 뿐,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그의 범죄로 비록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로까지 악화됐지만, 구속을 입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전화위복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율법 역시 본래 정죄의 역할이지만,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도록 해 주었습니다. 곧 죄인을 정죄한 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갈 3:24).
만약 우리가 율법을 준수했다면 율법의 정죄를 받을 일도 없었을 터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삼을(마 16:16)" 일도 없었을 것이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롬 5:20)' 은혜의 경륜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의 엄중함과 무관용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만을 요구했고, 낡아지는 옷 같은 인간의 의를(사 64:6) 무용하게 하고 오직 믿음만을 죄인들에게 요구했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입니다.
성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전(고전 6:19-20)이 되게 한 임마누엘(살전 5:10)의 은총을 비롯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부 됨(엡 5:25-27)의 은총 역시 죄의 구속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낳은 은총들(?)', 곧 '악을 선으로 만드시는(창 50:20)' 경륜들은, 죄책의 심각성이 간과된 채 실용주의적으로만 접근돼서는 안됩니다. 이는 하나님은 선을 창출하려 악을 이용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과(요일 1:5), 죄가 독생자의 죽음을 요구한 사실에서도(롬 3:25, 엡 1:7) 확인됩니다.
따라서 '죄의 결과가 낳은 은총들(?)' 이라는 표현보다는 '죄의 구속이 갖다 준 은총들'이라고 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타락 전보다 타락 후가 좋게 되는' 경륜은, '타락 허용 작정(ordaining of permission to fall)'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예정론 공격자들이 '타락 허용 작정(ordaining of fall to permission)'을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저주를 초래시킨 죄의 원인자로 만든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타락 후가 타락 전보다 더 좋은 결과를 야기한다면 그러한 누명을 벗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공격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님의 '타락 허용(permission to fall)'을 택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며, 이는 하나님을 '타락의 원인자'보다는 '은혜의 시행자'로 각인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감사를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2)",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