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년을 맞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ancouver Institute for Evangelical Worldview, 이하 VIEW) 원장직의 '바톤'을 건네주고 이어받는 양승훈·전성민 교수의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 이야기, 지난 1부에 이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양극화, 그리고 반성과 평가, 나아갈 방향을 들어봤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이념적으로 양극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쪽에서는 보수화됐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고학력자들만의 고고한 리그'로 박제화되고 있다고들 하는데요.
양승훈: 잠깐 언급했지만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학자들로부터 시작된 운동이기에, 그런 면이 있었음을 부인할 순 없습니다. 다만 근래 와서 양극화된 부분도 맞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요. 왜 그런지 구체적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1980년대 초 세계관 운동을 시작할 때는 당시에는 그 분들이 굉장히 진보적인 학생 그룹들이었지만, 세월이 가면서 그 분들이 보수화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세계관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반명사화 되고 그 단어의 현학적·지성적 분위기 때문에 많이 쓰게 된 경우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을 쓰면 지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깊은 뜻이나 역사적 맥락을 모른 채 사용하게 됩니다. 의미에 대한 갚은 성찰 없이 일종의 '클리셰' 가 된 것이지요.
전성민: 사실 학자들의 세계관 토론은 필수적입니다. 학자들이 학문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고민을 학문적으로 규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자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소통의 부재가 있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전달해 주는 '커뮤니케이터'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신학과 세계관에도 아주 전문적이고 철학적인, 학자들의 언어로만 이해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는 과학 분야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과학자들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지만, 과학계에는 이를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커뮤니케이터'들이 많이 있습니다. TED 영상 중에도 수학의 세계를 아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학이나 세계관 영역에서는 목회자들이 그런 '커뮤티케이터'의 역할을 해 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정말 많은 커뮤니케이터가 있는 것이지요. 좋은 분들도 있지만, 책임있는 역할에 어울릴 만한 훈련을 받은 능력 있는 커뮤니케이터들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학문적 토론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의미해 보일 만큼 이론적 논의가 치열할수록 현실에 더 큰 파괴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라고 하셨는데, 어떤 주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차이가 없으면 획일적인 것이고, 이는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차이'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먼저 '내 입장 자체가 얼마나 일관성 있는가, 얼마나 솔직하게 나를 성찰하는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좌든 우든 자기 입장의 내재적 모순이 발견되면 자기 입장을 조정해야 하는데, 모순이 발견돼도 그 입장이 사적 이익을 주기 때문에 끝까지 고수한다면 정직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그런 내적 모순이 있으면서도 사적 이익에 복무하는 입장들이 결국 문제를 일으킵니다.
둘째로 자체적으로 일관성도 있고 사적 이익에 복무하지 않는 입장이라면, 상대편과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서로 토론할 수 있는 문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기독교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화의 문화'가 실종돼 있습니다.
남은 시금석은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나의 입장이 실제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을 더 의미 있고 행복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입장의 유효함에 대한 판단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양승훈 원장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아주 넓게 이야기하면 '성경 위에 우리 삶을 세우는 것', 좁게 이야기하면 말 그대로 '기독교적으로 세계를 보는 관점'"이라고 전했다. ⓒ이대웅 기자 |
-한국의 기독 지성 운동에 대한 평가와 반성을 부탁드립니다.
양승훈: 기독 지성 운동은 '선지자적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선지자는 여론에 휘둘려선 안 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방향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시대의 예언자적 책임을 지닌 사람은 아무래도 정보가 많고 앞을 내다보면서 역사적 반성을 할 수 있는 지식인 계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자들은 이 시대의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들은 그 시대 사람들과 조화되고 칭송도 받았지만, 훨씬 더 많은 경우 핍박과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이 시대 크리스천 지식인들은 선지자라는 자기 정체성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만큼은 사람들의 전반적 의견에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다고 하는 바를 말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창조과학' 문제가 그랬습니다. '젊은 지구론'이 틀렸다는 확신이 있을 때는 말해야 합니다. 이는 또한 '성경을 보는 관점'에 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도 오류가 있을 수 있는데, 오류가 분명할 때는 고칠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내 성경 해석과 내 과학 해석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는 태도는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 자체가 비성경적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아닌, '자기 성경 해석의 무오'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아는 지식인들이 용기 있게 이야기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베드로전서 3장의 말씀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공격과 비난은 서로 대화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성민: 한국 기독 지성 운동을 평가하자면, 더 넓은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지성을 훈련하고 함양해야 하는데, 대화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자기 논리만으로 뭉친 고립되고 게토화된 것으로 만드는 경향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게토'라는 것은 우리 영역을 확보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를 확보하면, 바깥의 사람들과는 구분 짓게 됩니다.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은 타인을 배제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만일 게토화된 사람이 소수라면 모르지만, 힘을 가진 다수라면 배제와 혐오의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예전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많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정도(程度)'에 관한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요새는 '배제하지 않는 사랑', 구별과 분리가 아닌 '나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기독 지성 운동이 자칫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할 논리를 제공할 위험이 있음을 인식했으면 합니다.
양 교수님께서 '선지자의 핍박'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유교적 한국 사회에서 '공부(지식)'란 중심으로 진입 하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지성 운동가들이 선지자적 외침으로 핍박을 당하고 이를 감내하는 게 아니라, 지성 운동으로 받은 훈련을 '중심에 진입하는 도구, 사적 이익의 도구'로 만들어지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강한 표현을 써보자면 기독 지성 운동이 권력이나 힘에 '부역'하는 결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전성민 원장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마음과 몸에 배여있는 판단하고 결정하는 작동 기제"라며 "의식하기 전에 작동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한국 기독 지성 운동과 VIEW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신다면.
양승훈: 학문적 논의가 좀 더 치열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학문은 '할렐루야 아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학문의 언어와 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 지식인들의 1차적 책임은 학자로서의 논리를 좀 더 예리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 속에 명시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는 일도 있겠지만, 말씀드렸듯 그 일이 암시적일 수도 있습니다.
학문 자체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 세계에 대한 청지기적 소명'의 일부로 본다면, 그 영역은 가시적인 것뿐 아니라 논리, 심미, 예술, 문학 등 굉장히 넓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크리스천 학자들은 1차적으로 학문성을 길러야 하겠지요. 여기서 철저하지 못하다면, 책임을 방기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VIEW도 이런 의미에서 더 좋은 질의 교육을 하고 연구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학계나 교계 일반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용어로 교회와만 소통해 서는 정교한 논의를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학문성의 재고는 모든 크리스천 학자들의 사명 아닐까요.
전성민: 학문성 추구는 당연하고요. 아까 말씀드린 것을 추가하자면, 기독 지성 운동은 학문성을 추구하되 대중적 커뮤니케이터를 양성해야 합니다. 그 커뮤니케이션 대상은 교회뿐 아니라 사회가 돼야 합니다.
2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VIEW의 비전과 목표를, '한국 기독교의 미래 창조'로 정했습니다. '교회'의 미래 뿐 아니라 '기독교'의 미래입니다. 좁은 의미의 교회뿐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있는 '한국 기독교'의 미래를 창조하고자 합니다.
어떤 미래냐 하는 구체적 내용이 필요할 텐데, 기독교 지성과 세계관 운동이 실현될 영역을 '창조, 일상, 공공'이라는 3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창조, 일상, 공공의 영역에서 기독교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며, 경계선의 자리에서 세상과 대화하고, 포용과 환대를 몸에 익혀 교회뿐 아니라 인류의 번영을 위해 일하는 사랑의 지성인을 배출할 것입니다'. 20주년 기념식 때 말씀드린 이 내용이 저희 비전입니다.
이 표현은 저희가 지금 어떤 상태이며 어떤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압축해 놓은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의 세계관 운동이나 기독교를 보면 세상과 필요 이상으로, 또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영역에서까지 대립하고 대결하고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고립돼 버리고, 힘이 생기면 대결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독교 진리는 보편적이기에 대화가 가능하고 또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두려워하는 대결이 혐오와 배제를 낳는다면 자신감있는 대화는 포용과 환대와 결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머리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몸에 배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뿐 아니라 온 세상과 인류의 번영을 위해 일하는 것이 지성인입니다. '사랑의 지성인'이라는 표현은 최근 제임스 스미스의 논의를 담아보려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지껏 '지성의 제자도'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우리의 욕망도 하나님의 주재권 안에 놓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증명하기 때문' 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학문과 신앙 사이에서 흔들리는 젊은이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양승훈: 앞에서 언급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말은 어찌 보면 굉장히 자유주의적인 모토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 모토는 우리의 영역(scope)을 넓힐 기회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지적 추구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거나 움츠러 들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창조적인 한 인간으로서 담대하게 지적인 추구를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인간은 무한정 자유롭지는 못하겠지만,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개인적 경건을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흔히 말하는 개인적인 QT와 전도도 그렇고, 교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해야지요. 전통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도 필요합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 해도 여전히 연약한 인간이고, 지지그룹이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해 지나치게 냉소적인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최선을 다해 지적인 추구를 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요.
전성민: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기독교적 가치와 더불어 '진·선·미'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진리, 선함, 아름다움도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하는 신앙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으로 진리에 대한 추구와 더불어 선함에 대한 추구,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도 가능합니다.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이라고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 세계관의 적용 영역을 '창조, 일상, 공공'이라고 했을 때 창조 영역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창조에 대한 감사함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뿐 아니라 진·선·미 또한 하나님의 형상된 존재로서 추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