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스라엘에 갈 때마다 은혜를 받고 회복을 체험하는 곳이 갈릴리 바다입니다. 특별히 ‘베드로 수위권교회’라 부르는 그곳에, ‘그리스도의 바위(Mensa Christi)’ 즉 제자들에게 아침 밥상을 차려 주셨다는 그 곳에 엎드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수제자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것을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따지고 싶었을 현장이었는데, 주님은 오히려 조반을 차려 주시면서, 무언의 사랑을 먼저 베풀어 주십니다. 안 그래도 죄책감과 미안함과 후회, 좌절, 패배의식 속에 있었을 베드로는 주님의 아침상에 눈물부터 흘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눈물과 함께 마음이 녹아내리던 그 순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질문은 제가 그 현장 서 있을 때마다 들었던 음성이었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해서 말도 못 하고, 베드로처럼 그냥 예수님의 밥상을 다시 받아 들고 눈물만 흘릴 때였습니다. 자기를 배신한 제자들에게 밥상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한 인색한 제 마음이 너무 부끄러웠고,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결코 나의 열심이나 헌신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전적인 은혜였던 것을 자주 망각하는 죄가 제 맘이 달궈진 칼끝에 데이듯 뜨겁게 다가오던 현장이었습니다. 가끔 이 은혜가 희박해지는 듯하면 은혜의 칼끝에 데인 가슴을 들여다보곤 합니다.
“상처가 많은 나무가 무늬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상처가 일방적으로 당한 상처일 수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자기의 죄와 불순종, 혹은 억울한 상황에 성숙하지 못한 나의 모습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결과일 것입니다. ‘상처’라는 단어가 너무 남용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주사 자국이 남아 있듯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 영적인 흔적이 심장 수술을 받은 분처럼 제 가슴에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때로는 보기 싫지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용서를 받은 죄이지만,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도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던 나의 죄악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상처들이 요즘에 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실감합니다. 은혜가 넘칠 때는 격려하는 듯한 모습으로 ‘계속 잘 달려가라’하는 듯이 무늬가 나타나고, 부끄러울 때는 밥상 들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무늬로 등장하곤 합니다. 과거 불순종한 죄로 남겨진 상처는 우리를 기죽이는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인생의 이정표와 같은 흔적입니다. 나의 상처는 지금 어떤 무늬를 만들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