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늘 행복을 추구해 왔습니다. 인류역사의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개인 혹은 집단의 행복을 위한 결정들이었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도 ‘선악과가 너의 행복을 보장할 것이다!’ 라는 사탄의 꾐에 빠져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하는 죄를 범합니다. 아담은 그 순간 자신의 눈이 밝아지면 자신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선악과를 따 먹는 큰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남긴 인류 최초의 역사책인 “역사”에서 고대의 왕과 지혜자의 관심이 행복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Croesus)가 아테네의 지혜자인 솔론(Solon)에게 자신의 행복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크로이소스왕은 자신의 금고를 열어 황금보화를 보여주고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왕의 권력을 갖고 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많은 재물을 가진 크로이소스왕은 자신의 행복을 인정받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행복은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유의 주제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해방된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Epictetus)도 행복학 선구자였습니다. 칼럼리스트 김길호 씨는 시니어 신문에서 플라톤이 주장한 행복의 다섯 가지 조건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김길호 씨가 소개한 플라톤 행복의 조건 다섯 가지는 이렇습니다. 첫째, 먹고 살만한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부심은 높지만 사람들이 절반만 알아주는 명예, 넷째,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연설 솜씨 등입니다. 절제미 넘치는 행복의 조건들입니다.
서기 79년에 발발했던 화산으로 사라진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가 발굴되면서 많은 역사적 자료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폼페이시 어느 빵집에 걸렸던 액자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라틴어로 된 그 액자에 담긴 메시지가 “이 집에 행복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의 의식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문구입니다. 그들은 행복이 깃들어 있는 빵집에서 빵을 먹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빵 한조각을 먹으면서도 그들은 행복을 갈망했습니다.
중세 철학의 두 줄기를 형성했던 스토아학파와 에피큐리안학파의 논쟁도 결국 행복론이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절제의 행복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에피큐리안은 쾌락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것이 행복이라고 주장합니다. 행복에 대한 접근이 이들을 철학적 사유와 활동을 구분 짓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철학의 핵심주제도 결국 인간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럼 행복이 무엇인가요? 얼마 전 버지니아대학 오이시 연구팀은 ‘행복’에 관해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행복’의 사전적 정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1850년부터 지금까지 출판된 웹스터 영어사전의 개정판들을 토대로 살펴본 것입니다. 웹스터 초기 사전에서 ‘행복’은 대체로 ‘좋은 운’이었습니다. 그러나 1961년 이후 행복의 사전적 정의는 ‘삶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고 기쁜 상태’로 변했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행복 개념은 외부 조건에 따르는 ‘좋은 운’이라는 정의에서 ‘개인이 추구할 수 있는 삶의 만족스러운 상태’라는 개념으로 전환됩니다. 근자에 긍정 심리학자들은 행복을 대체적으로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 SWB)’과 삶의 만족감으로 정의합니다. 다소 애매한 정의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행복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정의를 보여줍니다. 시편 1편은 행복한 사람을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삶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처럼 높은 자리를 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필자주)”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진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