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펴낸 곳: 말글터. 이기주)라는 책에 보면 [더 아픈 사람]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버스나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몹쓸 버릇이 발동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나와 관계 없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곤 한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무심코 교환하는 말 한마디, 끄적이는 문장 한 줄에 절절한 사연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꽤 의미있는 대화가 귓속으로 스며들 때면, 그는 어로에 나갔다가 만선의 기쁨을 안고 귀항하는 어부처럼 괜스레 마음이 들뜨곤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일상에서 그가 엿들었던 의미있는 대화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언젠가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손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자세히 보니 꼬마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할머니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병원에 다녀 오는 듯했다. 할머니가 손자 이마에 손을 올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직 열이 있네. 저녁 먹고 약 먹자." 손자는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대꾸했다. "네, 그럴께요.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순간, 난 할머니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의 유형을 몇 가지 예상해 보았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라거나 "할머니는 다 알지"같은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었다. 내 어설픈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할머니는 손자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남보다 재빨리 알아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그리고 아파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어린 손자에게 할머니가 알려주려고 한 것도 이런 이치가 아니었을까?(그 책 p.17~19)
우리는 이민 와서 살면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외딴 곳으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사람들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지레 겁을 먹고 일정한 거리감을 두기도 합니다. 어느 목회자는 자신의 교회에는 왜 이렇게 상처받은 사람들만 오는 지 모르겠다고 토로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상처만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은 가정을 치료하는 가정상담치유 사역자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어릴 적에 역기능 가정에서 태어나 많은 아픔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겪었던 가정의 불화와 고통이 아름답게 열매를 맺어, 이제는 다른 가정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역자들이 된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가정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 치유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신 인물들을 살펴보아도, 남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모세, 다윗, 바울까지. 혹시 여러분이 요즘 많이 아프다면 아마도 다른 아픈 사람들을 위해 살라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가장 깊이 아프셨던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