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인도 출신의 젊은 변호사가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를 방문하게 된다. 그는 일등석 기차표를 샀지만, 역무원이 다가와 일등석에서 강제로 끌어내 화물칸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 이유는 ‘인도인은 일등석에 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욕을 당했고, 그는 그때부터 마음속에 분노를 품게 되었다. 그가 바로 인도의 영웅 간디이다. 그가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분노’였다. 이처럼 부정의와 불의에 대해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는, 즉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건설적인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분노란 무엇인가? 분노는 흔히 불합리한 사건을 통해 모욕과 상처를 받을 때 생기는 부정적인 정서 상태이다. 이는 실망감, 당혹스러움, 거부감, 상처 등을 아우르는 감정인 동시에 신체, 마음, 의지까지도 포함한다. 흔히 기독교에서는 분노를 타락한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분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인 공의로움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도덕적 피조물로서 옳고 그름에 관해 판단 감각과 능력을 갖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분노를 통해 인간이 불합리한 상황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로 이끌어갈 수 있게 하셨다. 또한, 분노는 우리 내면에서 변화가 필요한 부분을 알려주는 경고 신호의 역할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의하거나 옳지 않은 것을 만나면 분노하게 되고, 이를 바로 잡으려고 시도하게 된다. 즉 분노는 불의의 상황을 바로잡고 건설적이며 긍정적인 결과로 이끄는 자극제이자 동기 부여제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노는 불의를 바로잡을 강력한 힘이지만 동시에 파멸로 이끌 위험성도 존재한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한다. 이는 분노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화가 나더라도 죄 된 생각이나 행동으로 발전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분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이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반응해야 분노를 파멸이 아닌 긍정적인 결과로 이끌 수 있을까?
먼저, 분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분노는 죄로써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기본적 속성 중 하나임을 인식하고, 자신이 분노를 느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는 필요한 것이다. 영혼을 충족시키고 용기를 북돋우기 때문에 분노가 없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적절한 분노의 표출은 실제로 표적의 대상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고,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자기 분발의 계기가 된다. 따라서 불합리한 상황을 건설적으로 바꾸는 에너지로서 분노의 기능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분노의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흔히 분노를 모두 표출해내는 것이 분노를 순화시켜준다고 알고 있지만, 오히려 분노를 강하게 표출할수록 분노에 동반되는 생리적 활동이 활발해지며 분노나 공격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 따라서 분노를 그대로 표출해내기보다 분노의 원인을 밝혀 건설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노에도 도덕성 상실로 인해 생긴 정당한 분노와 도덕성과 상관없이 상황을 왜곡해서 생긴 왜곡된 분노가 있다. 누구에게 화가 난 것인지, 무슨 잘못이 있는지, 모든 사실을 확실히 아는지, 문제의 심각성 정도에 대해 생각해보면 자신의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 왜곡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정당한 것이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만약 왜곡된 것이라면 이를 인식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이해를 구하며, 변화를 요청할 때, 긍정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분노를 처리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모색해야 한다. 이 분노에 긍정적인 부분이 무엇이며,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 그 행동이 사랑을 바탕으로 행해지는 것인지, 나와 상대방에게 유익한 것인지 등을 모색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반응은 분노를 사랑으로 대면해 관계가 회복되고 화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용서가 따른다. 이때 용서는 희생을 바탕으로 타인에 대한 분노를 제거하는 것이며, 의지적인 행동이 동반된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최선의 반응이지만, 항상 화해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노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성숙하게 처리하려는 과정을 통해서 얻는 긍정적인 결과가 있다. 만약 상대방과 대면해서 바로 잡아야 할 가치가 없거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경우에는, 그 잘못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식적인 결단과 의지가 필요할 때도 있다. 이럴 경우 상황이 변하지 않더라도 감정적, 육체적인 에너지 소진을 막을 수 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분노와 심판을 맡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가 된다.
에베소서 4장 31~32절에는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는가? 그 분노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 하나님은 분노를 동기 부여제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며 불합리한 상황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를 원하신다. 또한, 분노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누린 자로서, 이를 겸손히 실천하기를 원하신다. 분노라는 감정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성품을 단련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쫓아 이를 실천할 수 있다면, 분노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며 거룩함을 닮아가는 또 다른 하나의 통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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