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조론 각론을 쓰기 시작하면서
기독교는 가장 먼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것을 고백하는 종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믿지 않고는 예수가 그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의 믿음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무조건 믿으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대에는 우주만물이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무신론적 주장이 만연(漫然)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어떤 종류의 믿음에도 먼저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경험적 자료를 요구하고 있다. 현대인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기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아직 그런 자료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에 가장 큰 숙제로 등장하고 있다.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제대로 알게 할 수 있다면, 누가 기독교인이 되기를 거부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 선교를 위해서도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창조론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동안 기독교에 창조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기독교 교리를 가장 잘 진술한 것으로 알려진 것은 영국 개혁교회가 1643-1647년에 걸친 연구 끝에 제정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전문 33장으로 만들어졌고, 창조에 대해서는 제4장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4-1. 만물 창조: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태초에 엿새 동안에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간에 다 무(無)로부터 창조하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들은 다 매우 좋았다.
4-2. 사람 창조: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신 후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이성적이고 불멸적인 영혼들을 갖게 하셨으며,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을 부여하셨고,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게 하시고 그것을 수행할 능력을 소유하게 하셨으나, 변할 수 있는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에 맡겨져 있어서 범죄할 가능성 아래 있게 하셨다.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이 법 외에, 그들은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것을 지키는 동안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행복하였고 피조물들을 다스렸다.
위 4-1에 서술된 하나님께서 '태초에 엿새 동안에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간에 다 무(無)로부터 창조'하였다는 말을 살펴보면,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오는 이 구절들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성경해석에 바탕을 두고 작성한 것이다. 당시는 과학혁명의 시발점인 지동설 논쟁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고전적 창조론을 현대 과학적 시각으로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문제는 19세기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하여 진화론을 발표한 이후에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나온 창세기 주석이나 해설서, 또는 이와 관련한 창조론들도 고전적 창조론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개 그런 창조론들이 문자적 성경해석에 의하여 서술된 것으로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 진화론 비판을 위하여 젊은 우주론을 주장한 것이 창조론에 문제를 키우게 되었다. 이들은 고전적 창조론에 전 지구적 노아의 홍수가 지구의 모든 지질을 형성하는 사건이었다고 주장하는 『신지질학』을 덧붙였다. 이것을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이라고 불렀다. 과학적 창조론은 진화론뿐만 아니라 오랜 우주론을 주장하는 당시의 지질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과학적 창조론을 그대로 답습한 존 위트컴과 헨리 모리스가 『창세기 홍수』를 저술하여 창조과학(Creation Research) 운동을 세계적으로 전개하였고, 그 추종자들에 의하여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창조과학자들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관 수준의 창조과학으로 현대과학을 이기려고 덤벼든다. 그것은 천동설로 지동설을 이기려고 덤비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기독교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을 주장하는 일부 기독교인들 때문에 현대과학을 배운 현대인들-특히 젊은이들-로부터 아예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주의가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는 21세기에 현대인들에게까지 창조과학적 창조론이 그대로 통용될 수 있다는 안이한 인식에 빠져 있다면, 기독교는 현대과학에 밀려 쇠퇴의 길로 가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안이한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나태함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창조과학적 창조론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을 강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성경은 바꿀 수 없다고 할지라도 새로 발견된 '과학적 사실'이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성경해석과 창조론은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하는 것이다. 성경해석과 창조론의 목적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그에 의한 창조사건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다'라는 기독교 교리를 진실로 믿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창조과학적 창조론 자료들을 보면 진화론이나 그들과 견해가 다른 창조론들을 비판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 기독교인들은 그런 것들을 기독교의 창조론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 창조론들은 일반인들의 기독교를 보는 시각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독교 창조론에서 진화론이나 창조에 관하여 견해가 다른 주장을 비판적으로 다룰 수는 있다. 그렇지만 창조론에는 어디까지나 창조의 각론이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 창조론은 역사적 사건인 하나님의 창조를 다루는 것이다. 사실 완전한 창조론은 역사적 창조사건을 사실대로 기술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의 사건을 직접 목격한 인간이 없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채택할 수 있는 차선책은, 그 시대의 조건에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올바른 창조론'을 서술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과학적 사실'로 이해하려면 육하원칙에 따른 각론이 서술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과학적 사실'이라 함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과학적 이론으로 검증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올바른 창조론이라는 말은 '과학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서술한 창조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조론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창조론에 이의를 제기한 진화론이 무신론의 기초이론으로까지 진화하였다. 이렇게 진화한 진화론이 현대 세계관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그 반작용으로 창조론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마스 쿤(Thomas Kuhn, 1922-1996)은 위기에 빠진 패러다임(paradigm)은 교체되거나 혁명적 수준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조론에 닥친 위기를 타파하려면 창조론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창조론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실질적으로 필요하게 된 것은 현대인들에게 무신론적 진화론을 극복하고 창조론을 납득시키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안이하고 나태한 기독교인이라도 창조론이 무신론적 진화론으로 교체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창조론의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려면, 먼저 무신론적 진화론들에 대한 비판부터 수행해야 한다. 필자는 무신론적 진화론들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여 『과학과 신의 전쟁』을 이미 출판했다. 창조론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다음 차례의 작업은 기존의 창조론들을 '과학적 사실'에 비추어 살펴보면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창조론을 올바르게 다시 쓰는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올바른 창조론'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창조과학적 수준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현대적 수준의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육하원칙에 따라 다시 서술하는 수밖에 없다.
필자는 『과학과 신의 전쟁』에서 과학적 무신론을 비판하고 '과학적 유신론'을 논증하면서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창조 사건의 상당 부분을 이미 서술했다. 역사적으로 따지고 보면 창조론을 연구하면서 신학이 시작되었고, 신학과 과학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것이 철학이다. 과학은 자연철학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올바른 창조론은 신학과 과학과 철학의 통섭적 연결을 통해서 논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이제부터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 체계를 갖추어서, 과학적 유신론의 논증에 필요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창조론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서, 육하원칙의 각 항목에 따라 '올바른 창조론'을 다시 쓰려고 한다. 그 이유는 현대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수준으로 창조론의 패러다임을 통섭적으로 바꿔야 할 필요성에 의해서이다.
▲허정윤 박사가 자신이 쓴 책 「과학과 신의 전쟁」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
필자는 여기서 '올바른 창조론'의 각 주제를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관과 현대 과학적 세계관 사이에서 논의할 것이다. 그 첫 번째 주제로 창조사건의 발생 시기에 대해 "지구의 나이 6,000년 설은 기독교적 진리인가?"라는 제목으로 본지에서 칼럼 형식으로 연재한 바 있다. 이제부터 그 두 번째 주제로 이 칼럼의 소제목과 같이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어디에서' 창조하셨을까?"에 관련한 논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창조사건의 육하원칙에서 보면 발생 장소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올바른 창조론' 논의에 성경과 그동안의 창조론 자료들, 그리고 현대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논의했던 『과학과 신의 전쟁』의 자료들은 물론, 새로 나오는 최신 자료까지 활용할 것이다. 말하자면 과학과 철학과 신학의 통섭적 이해를 바탕으로 서술할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올바른 창조론'을 가능하면 체계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서술하려고 한다. 이렇게 서술되는 '올바른 창조론'은 현대사회의 일반인이나 크리스천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를 보다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