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향상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 한계 안에서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도 지친 일꾼들이 많이 있습니다. 능력의 한계에 부딪히거나 사랑의 한계, 인내심의 한계, 혹은 좋게 풀려고 해도 풀리지 않는 인간 관계의 한계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는 한계가 없으셨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나이 30세가 될 때까지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이웃집 오빠처럼 그저 평범하게 사셨습니다. 평일에는 성실한 목수였고, 주말에는 회당에 나가는 청년이었죠.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라면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신 듯합니다.
드디어 3년간의 공생애가 시작되자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유혹의 핵심은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신 한계를 어기거나 뛰어넘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 모두가 경험하는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사탄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떡이 되게 해봐~."(마4:3) 이 때 예수님은 40일 동안이나 먹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대단히 약해져 있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이렇게 굶어 죽을 정도로 힘들게 살면 말이 되지 않잖아? 뭐든 해 봐요~.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능력을 사용해야지..."
그런데 예수님은 한계라는 선물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돌덩이는 그냥 돌맹이로 남아있게 했습니다. 왜일까요? 히브리서 5장 8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사탄은 포기하지 않고 더 강하게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서 뛰어내림으로써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저길 봐, 사람들이 너를 보고 있잖아~.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줘! 그렇지 않으면 다들 당신을 신뢰하거나 존경하지 않을 게 뻔해." 슈퍼맨처럼 성전 꼭대기에서 날아 내려오는 모습은 정말 멋있어 보일텐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점프 한 것이 아니라, 계단을 하나씩 뚜벅 뚜벅 걸어서 내려오셨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죠. 스스로 대단한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었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었지만 주님은 아무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사도 바울이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2:6-8) 바울은 우리에게 주님의 이런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에게도 요즘 고난과 십자가라는 한계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한계를 치워주시거나 건너 뛰게 하신다면 사역은 훨씬 신속하게 이뤄질 지 모르죠.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은 나의 교만을 위해서 하신 말이 아닐 것입니다. 한계 안에서 연약하게 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고, 우리는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기범 칼럼]한계를 느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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