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배반이란 말이 있습니다. '서로 모순 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를 뜻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원수를 사랑하라'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나에게 조그만 상처를 준 가족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말과 행실이 다른 것입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개념이 한 사람에게 있을 때, 우리는 이율배반적이다...라는 말을 씁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율배반적인 모습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런 행태를 꼬집은 대표적인 말이 '내로남불'이란 말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남이 하면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불륜인 것이고 자신이 하면 남녀간에 일어난 아름다운 로맨스라는 것입니다. 90년대 초반부터 이 말이 얼마나 자주 쓰였던지 국립국어원의 사전에 등재될 정도였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지 않은 정치인들의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국민들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율배반적 세상에서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슬픈 이율배반은 어떤 것일까요? 사실 정치인들의 변절은, 오히려 예측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이율배반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교회의 변절일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세상적 성공을 추구하고 있는 교회, 예수를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개인적 욕구를 추구하는 교회 리더들, 그래서 돈과 쾌락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오늘날의 교인들... 천국을 말하면서도 가슴 한 가득 세상을 끌어 안고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보다 더 슬픈 이율배반이 있을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십자가로 가는 길은 예수님께도 아픈 길이었습니다. 피하길 원하셨던 길이었습니다.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기도하셔야 했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보셨고, 또 믿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율배반적인 삶을 사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예배는 정말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예배드리는 우리의 마음이 사람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다른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변에 이율배반적인 예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봉사가 이율배반적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안의 이율배반적인 우리와 싸우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장 목사